워낙 덤벙거리고 부지런떨 줄 몰라서,
그저 잘 닦아쓰는 정도로 쓰고 있는데도
여전히 냄새가 난다던가, 고장난 구석 없이 잘 쓰고 있다.
엄마가 세탁기를 사주던 때에
꽤 울었던 기억이 났다.
우리집 세탁기는 몇 십년 된 걸 쓰면서, 내 세탁기는
새거를 사준게 눈물이 났던 걸까,
그냥 마음이 싱숭생숭 하여
그랬을지도.
세탁기를 돌리면서,
그냥 그때의 앳된 내가 생각이 나서.
나의 서울살이를 세탁기가
버텨낸 세월만큼 함께한 기억이 나서.
웃기고 허망하고
또 슬프고 그래서.
세탁기를 돌리면서,
별 생각이 다드네.
-Ram
*세탁기
지난여름, 방콕에서 두 달 정도 있었을 때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 구하기. 오피스텔이나 콘도를 위주로 봤고, 대부분의 콘도에는 수영장이 다 딸려 있긴 했지만 내가 가장 중점적으로 본 것은 세탁기였다. 부모님 집에서 독립한 후 스스로 집안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집안일 중 가장 짜릿했던 건 빨래통이 비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보통 2~3일에 한 번씩 빨래를 돌리곤 했는데 3~4일, 또는 빨래가 많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곧바로 스트레스로 이어졌다. 그래서 세탁기가 웬만하면 꼭 집안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에어비앤비에서 가격이 조금 높아도 무조건 세탁기가 집 안에 있는 곳을 위주로 고르고 또 골랐다. 공용 세탁기가 지하에 있는 곳은 조금 더 저렴했고, 아예 세탁 시설이 없는 곳(바깥에서 따로 맡기거나 셀프로 세탁해야 함)은 더더욱 저렴했다. 한 달 이상 살기 위해선 숙소 가격도 물론 중요하긴 해서 조금 갈등이 생기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세탁기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조건. 드디어 고르고 고른 곳 중 한국에 있는 오피스텔처럼 드럼세탁기가 싱크대 밑에 매립되어 있는 곳을 정했고 아니나 다를까 방콕에서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세탁기를 돌렸다. 드럼이라 통돌이보다 더더욱 적은 양을 넣어 돌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빨래가 하룻밤 사이에 다 마르기 때문에 날마다 빨래를 개고, 세탁기를 돌리는 낙이 쏠쏠했다. 방콕 한 달 살기가 될 줄 알았던 여행은 두 달로 이어졌고, 제일 조그만 세제는 금방 동이 나서 조금 더 큰 세제를 사오기도 했다. 친절한 에어비앤비 오너는 싱크대 아래에 세탁할 수 있는 가루세제를 갖다 두었지만 액체세제를 선호하는 나는 가루세제에 손도 대지 않았다. 방콕 여행의 끝이 보일 때쯤 남은 액체 세제는 가루세제 옆에 나란히 넣어두었고, 섬유 유연제는 딱 맞아떨어지게 다 쓰고 나와서 더 짜릿했다. 이번에 새로 이사 온 집에도 세탁기가 필요했는데 아무래도 나는 드럼보단 통돌이 파여서 통돌이 중에서도 꽤 큰 용량을 구매했고, 널찍한 스탠 통에 시원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며 여전히 흡족해하고 있다.
-Hee
*세탁기
일이 생겨 몇 주 만에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는데 수납함에 빨아둔 수건이 하나도 없었던 날, 새삼 화가 차올랐다. 처음에야 여태 세탁기를 스스로 돌려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랬다지만 이제는 그런 변명도 통하지 않을 때가 아닌가. 지영이 게으른 사람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지만 참 너무한다 싶었다. 세탁기가 아무리 좋아봤자 사람이 게으르면 답이 없다~ 이래서 아기 낳고 애 옷이나 제대로 빨겠나~ 한참을 다퉜다.
거의 매일 세탁기를 돌리고 손빨래해야 할 옷감들과 운동화를 세탁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 모든 일들을 직접 하게 되니까 집안일을 몇십 년이나 꾸준히 해왔다는 게 참 위대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화를 못 참고 쏟아냈던 날, 지영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결혼 같은 것을 할 준비는 안 됐었다는 걸 알게 됐다. 정작 중요한 것들을 모른 체하고 이런 사소한 일들에 목숨 걸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미안한 마음은 딱히 들지가 않으니, 이걸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Ho
*세탁기
오늘도 팽팽 돌아가는 우리집 세탁기
집안일 중에서 빨래를 가장 좋아한다.
대부분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줘서 좋고,
말끔해진 옷을 널고 세제냄새가 집에서 나는게 좋다.
얼룩이 생기는게 싫어서 언제부턴가 흰옷을 안산다.
흰옷은 조심성많고 부지런한 사람이 입을수 있는 옷 같다.
어제 옷장정리를 했는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옷을 절대 안살거라고.
이미 너무 많은 옷을 가지고 있고 어쩌면 지금 가진 옷으로 평생 입을수 있을것 같다.
이러고 난 또 싼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티셔츠를 살수도 있겠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물건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고 싶다.
내가 좋게말해서 섬세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해서는 개예민충인 프로불편러인데, 나는 단 한 번도 내 개예민충을 누군가에게 표출한 적이 없다. 이건 내 타고난 성향+성장과정에 의한 복합적이고도 복잡한 이유인데, 일단 나는 실제로 사람을 대할 때 기분이 나쁘고 어쩌고, 불편해서 저쩌고 등등 의 말 하기 자체를 어려워 한다.
이것도 이유가 한 바가지인데 한 마디로 정리하면 ‘쟤한테 말해봤자...’이다. 말해봤자 어떻게 나올지 반응이 뻔하고, 말해봤자 좋은 쪽으로 해결될 일이 0이다 라고 판단이 내려진 이상 정말 ‘말해봤자..의 상황’을 직면하기 때문이다. 누군 말하지 않고 판단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때에 따라, 경우라는게 있는거다. 나도 좋게 해결될 것 같으면 아주 예쁘고 고운 말로 포장해서 좋게 해결할 수 있지. 그게 뭐 어렵다고. 굳이 내 예민함을 드러내고 지랄맞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좋게 해결되는 경우가 대부분 없다라는것이 통탄스러울 일일뿐.
반대로 자기 기분이 상하면 감정을 폭발시켜서 너 어디 한번 물려봐라 라는 식으로 득달같이 물어뜯는 유형의 사람도 있다. 나는 그것만큼 멍청한 인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때론 그래도 나처럼 말도 못(안)하고 입 꾹 닫고 마음 닫는 음침한 멍청이보단 낫지않을까? 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속만 시원하고, 남의 마음을 병들게하는 유형이기 때문에 나 같은 유형도 등신같지만 후자의 유형은 병신같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기분 나쁘다는 표현을 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면서. ‘내가 오늘 좀 예민한가, 너가 하는 말이 왜 이렇게 무시받는 기분이 들지?’ 라고 했더니, 역시나 상대방은 요목조목 따져가면서 화를냈다. 제일 웃겼던 것은 왜 자기 눈치를 주냐 였다. 차라리 기분이 나쁘면 나쁘다고 말을 하지 왜 눈치주는 식으로 말하냐고. 근데 진짜 웃긴게 내가 그냥 나쁘다고 말했으면 그거대로 기분이 나빴을 건데 둘이 뭐가 그렇게 차이가 있나싶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에게 베푸는건 늘 호의라고 했다. 저 말 자체가 이미 관계의 상하관계가 있는 말투 아닌가. 꼭 ‘너는 내 호의를 받을 수 있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런 뉘앙스처럼 느껴져서 역겹기까지 했다. 호의? 웃겨 진짜. 나도 호의 베풀어. 그리고 왠만한 사람들은 타인에게 다 친절하고 호의를 베풀어. 시발 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상대방은 자기를 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냐면서 넌 이미 니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겠네 너 마음대로 해 라고 종지부까지 찍었다. 그래서 그냥 ‘응’ 이라고 했다.
마지막에 응 이라고 말하는 내가 참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원래 사람은 생각보다 다 별론데 뭐. 그래도 이번 기회에 인간관계도 다시 정리하고, 기분 나쁘다 솔직하게 표현하는게 그렇게 나쁜건 아니구나 라는 경험도 하게되었으니 앞으론 속에만 담아두지 말아야겠다. (물론 이러고 또 말 안하는 날이 더 많겠지만) 하지만 나쁘다는 표현을 좀 단정하게 포장할 필요는 있겠지. 어휴 시발 기분 나쁘다는 것도 포장해서 말해야하는 이 불편함. 그래서 내가 말 잘 안 하는 건데. 그래도 이것도 나이들면서 쌓아야하는 교양스킬이라고 생각해야겠다.
한 가게에서 자동차 엔진 오일도 사고, 치약도 사고 초콜릿도 사고. 필요한 건 다 있네! 싶다가도 모두가 찾는 것이니 이렇게 파는 거겠지? 싶은 생각에 다들 사는 게 고만고만 비슷비슷 하구나- 싶다.
우리 동네 코스코는 주변에 암것도 없이 덩그라니- 있었는데 요즘 주변에 뭔가 많이 생기고 있다. 바로 길건너에는 큰 창고같은 게 들어서면서 풍경이 달라졌고 90도 반대편으로도 뭐가 들어서려는지 땅 다지고 있다. 코스코 있는 블럭 돌면 또 공사가 한창인데 여긴 길이 새로 나려는지 꽤 넓은 땅에 공사차들이 가득 있다. 이 땅 예전엔 그냥 소들 풀 뜯고 송아지들 작은 개울에서 물마시고 그러던 곳인데 이제 개울도 없어지고 땅이 다 평평해졌다. 동네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