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hyerinyang · 3 months
Text
<Plan 75> 내일 아침을 다시 맞이할 자유
Tumblr media
타이틀 폰트의 75는 포토샵 실수가 아니고, 실제로 영화 오프닝 타이틀부터 블러처리가 되어있다.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에서 제목 폰트와 무빙도 서사를 암시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나이, 75'
개봉하루 전 날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문화센터 시네마에서 시사회를 해서 보러갔다. 22년도에 <슬픔의 삼각형>을 예매하려다가 비행기 시간표 변경떄문에 티케팅을 포기한 영화다. 그 뒤로 잊고 지내다가 작게 아름아름 홍보가 뜨길래 검색해보니 서울에선 유일하게 COEX 쪽 지점에서 미리 볼 수 있었다. 마침 그 날 저녁 맡은 수업도 없고, 드라마 연출부하는 친구와 근처에서 피자먹는 약속이 있어서 여러모로 동선과 시간이 절묘하게 딱 떨어져서 느끼는 소소한 쾌감을 가지고 기분좋게 보러갔다.
문화센터는 유치원때 몬테소리나 쿠킹 클래스를 하러 엄마 손 붙잡고 다녔는데 성인이 되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올 수 없는 시간에 11층에 올라가니 은퇴한 장년이나 노년층 분들이 계셨다. 하필! 영화가 75세 이상 안락사를 정부가 적극 장려하는 디스토피아적 코드의 SF 영화라... 보다 불편한지 나가는 분들도 있었다.
서늘하고, 섬뜩하고, 절절하고, 먹먹했지만 SF 하면 떠올리는 미래적인 느낌보다는 '진짜 요즘의 일본 사회 젊은 세대의 머릿속에 저런 생각들이 은연중에 깔려있나?' 현실적이라서 더 무섭다.
이 영화의 단편 버전을 몇 년 전에 본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오랜만에 신인 감독들의 옴니버스형 단편들을 모아 제작을 맡았다길래 챙겨 보았다. 그 중 이 작품만 장편화가 된 것이다. 그 때는 무미건조체여서 영화라기 보다는 단편 소설의 한 장면 같았는데 장편화된 버전에서 당사자와 주변 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과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따라가다보니 답답했다.
안락사 당한 노인들의 소지품을 수거해서 분류하는 장면은 <쉰들러 리스트>의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던 유럽의 수용소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공장의 모습과 흡사했다. 영화를 보고 몇 일이 흘렀는데 내 삶을 거꾸로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영화라는 무지개를 쫓아 청춘을 공중에 흩뿌리고 있
얼마전 카페에서 옆 테이블 아주머니들이 커피잔을 탁 내려놓으며 농담조로 하시던 소리가 기억난다.
'나이드는 건 슬픈데, 돈 없이 나이드는 건 더 슬퍼.'
'그건 아주 서글프지.'
그 땐, 내가 사는 동네가 워낙 학원가라 각종 공부 정보 공유와 서로의 엄친아, 엄친딸 자랑과 비평 삼매경이 흔하게 들리는 장소성의 맥락에서 나온 수다떨기 테마주 하나라고 그냥 넘겼는데... 이 영화와 연결지으면 절대 웃긴 농담이 아니다.
슬픈농담.
평생 중학교 역사 선생님을 하다가 얼마전 은퇴한 엄마에게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하니 일본은 원래 그렇다며, 예전 사무라이 무사 계급 정권-군국주의 시절부터 노인들이 노동력 떨어지면 조용히 산에 버리고 오거나 유기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카더라설이라 신빙성 문제가 있어서 검색을 해 보니 일본 고전문학의 한 설화가 나온다.
우바스테야마 (姥捨て山)는 '할머니를 갖다 버리는 산'이란 뜻으로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노인 유기 설화이다.
〈시오리형〉(枝折り型) 설화 -> 입을 줄이기 위해 늙은 부모를 업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올라가는 동안 부모는 계속해서 시오리(산이나 숲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통과한 길을 표하는 일)를 만들거나, 혹은 쌀겨를 땅바닥에 뿌린다. 그 모양을 본 아들이 궁금하여 왜 그러냐고 물으면 부모는 “네가 산을 내려갈 때 헤메지 않게 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버려지는 상황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에게 가책을 느낀 아들은 부모를 데리고 산을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난제형〉(難題型) 설화 -> 어느 번의 영주가 연로하여 노동을 할 수 없는 인구는 불필요하므로 산에 유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어느 집에서 감히 법을 어길 수 없어 울면서 늙은 부모를 산에 갖다 버리려다가, 결국 버리지 못하고 몰래 집의 마루 밑에 숨겨둔다. 얼마 뒤, 이웃 번에서 몇 개의 어려운 문제를 내면서, 이 난제를 풀지 못하면 쳐들어와 멸망시키겠다고 협박한다. 그런데 마루 밑에 숨어있던 늙은이들의 지혜로 문제를 풀게 되고, 노인들의 가치를 알게 된 영주는 법을 철회하고 노인들을 소중히 대우했다는 이야기다. (출처: 위키백과)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인데 고려장이 일제국주의 시절 조작된 걸 수도 있다는 가설이 단순 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근거 1, 2는 될 수도 있겠다. 어릴 때 도쿄나 오사카에 갔을 때 제일 놀랐던 건 지하철 탔을 때 일본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있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다. 물론, 몸이 불편한 사람이 도의상 우선 사용하는 좌석같은 형태가 있지만 노약자석이 '무조건적'으로 보편화 되어있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굉장히 생소한 풍경이었다. 전쟁과 식민지 프론티어를 늘리던 시절의 사상적 잔재가 남아있는 것일까? 서늘하고, 씁쓸하다.
그러나 일본사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사회도 장유유서, 노인공경이 사회적 슬로건으로 형식적으로나마 사람들의 에티켓에 베여있지만... 어쩌면 겉포장에 자기만족일 뿐 우리가 사는 커뮤니티의 내장 속속들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무관심하다는 것을 외면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난 가을 성북 청춘 불패 영화제에서 '집'이라는 공간에서 존재와 커뮤니티의 풍조를 고찰하는 영화들을 하나의 섹션으로 되어있어 본 적이 있는데 내 옆자리 감독님이 '노인 고독사'에 관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수상을 하셨다. 그 고독사 현장의 시간을 거꾸로 거스르며 홀로 남겨 죽은 이의 빈자리와 지난 시간을 거스르는 메세지 강한 작업이었다. 유품정리사들이 맡는 냄새란 어떤 것일까? 그 사람이 젋고, 건강하던 시절의 사는 모습은 어땠을까? 나는 가끔 뉴스나,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소재로만 그것을 슬쩍 볼 뿐 지속적으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조금은 더 직접적으로 나와 내 이웃의 인생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확신있게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만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하면 지금의 삶을 다른 각도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스위스로 안락사 여행을 택하는 소재의 영화가 근래에 종종 개봉하고 있다. 정말 내 스스로 나의 끝을 선택하고 싶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 속 기계 오작동으로 병원에서 나와 해를 바라보는 미치 할머니의 뒷모습은 절경이다. 황금 카메라상 부문 특별언급상 수상은 바로 이 장면 떄문에 더 빛난 것이 아닐까?! 황혼은 시간을 모르고 보면 떠오르는 아침 해 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지만 석양은 아침처럼 강렬한 해를 보며 새로운 하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78세 여성 미치는 내일 다시 아침을 맞이할 자유를 꿈꾸며 해를 마주한 채 내일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결말이 걱정되었는데 뻔하더라도, 나는 이 장면이 참 좋았다. 아무리 디스토피아라도 자신만의 한 줄기 빛, 유토피아는 필요하니까.
0 notes
hyerinyang · 3 month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마지막 남은 사랑니를 뽑고, 약먹고 누워서.... 2년 만에 잊고 있던 텀블러에 들어와봤다. 다시 써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하루 중 얼 마의 시간을 내어 다시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천천히, 느리게, 조 금 더 머물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장미꽃을 너에게 보낸다. 잘 감상하이 보아라." 어느 봄 날 길을 걷다가 서투른 문자 메세지와 함께 장미꽃 사진 을 카톡으로 보낸 외할아버지가 올 봄에도 살아계셨다면 여느 때 처럼 다시 돋아나는 새로운 꽃봉오리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보 내셨을 것이다.
어제 외삼촌이랑 엄마랑 할머니 면회를 갔는데 다들 할아버지 이 야기가 나오면 아차 하고 말을 돌린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 가신 증조할머니도 우리 엄마 어딨어? 엄마 보고싶어! 어린아이 처럼 찾는 할머니에게 몇달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까 지 매번 새롭게 받아들이는 건 너무 무리다.
한 사람이 떠난 뒤에 남기고 간 것들은 몇 계절이 훨씬 지나며 문 득문득 떠오른다. 살면서 스치듯 지나가는 이미지를 보았을 때, 냄새를 맡았을 때, 공기가 볼을 부비며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려줄 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휙 하고 기억의 편린이 스친다.
그래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할아버지가 나의 마음에 심어준 생 명력 가득한 무언가를 계속 잘 키워봐야 겠다고 건강한 긍지를 띠 고 더 힘을 내게 된다. 애도 기간의 라인 그래프는 11개월 정도 지 나며 이제 건강한 미소와 함께 좋은 기억을 말하는 단계를 지나고 있다, 삼촌과 엄마도 그런 것 같다. 다만, 곧 설이라는데 외가가 없 어져서 마음이 공허하다. 구멍. 고향, 거긴 내 마음의 집인데...이 텅 빈 공간은 나이들며 갈수록 커지고, 또 다른 무언가 대체될 만 한 시간-사람 공간을 찾으며 적당히 상쇄하려고 애쓰며 갈게 되 겠지? 물론, 아주 상쇄되진 않고, 하나 그리고 하나? 그리고 또 하 나씩, 다른 존재와 시간이 하나씩 늘어갈 뿐이다.
January, 2024.
0 notes
hyerinyang · 3 month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Born Into Brothels 🎬
1 Feb, 2024.
0 notes
hyerinyang · 3 month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사랑니 뽑아 퉁퉁 부은 볼도 어느 새 조금씩 붓기가 빠지고 있다.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다니는 중이지만. . .그래도 이정도면 사람같이지고 있다. 🙂💭 반대쪽으로만 씹느라 이쪽 턱이랑 관자놀이까지 통증이 밀려온다…🧘🏻‍♀️ 이래저래 비대칭된 얼굴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데에는 한 달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
7 Feb, 2024.
1 note · View note
hyerinyang · 3 year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Lately things have been changing. 🎨🍂🍁
10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3 year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만의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두려움과 공포는 잠시 뿐이고, 곧 마음이 편해졌다. 어쩌면 이렇게 삶을 잠시 멈추고, 푹 쉬며 나를 돌아보고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번 여름엔 장편소설을 한 편썼다. 세 편의 중단편이 옴니버스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구성인데 <장밋빛 새벽에> 는 원래중편 누벨라였고, <슈팅백>은 시나리오를 위한 트리트먼트, <4 피트 박스>는 미대에서 그린 설치미술 작품을 위한 드로잉이었다. 가만히 집에 있었더니 그간의 노트와 스케치북들을 펼쳐보게 되더라. 늦겨울 초봄 무렵부터 일상생활 틈틈이매일 몇 시간씩 쓰고, 마무리 정리작업을 하던 7월엔 최소한의 외출 외엔 내 방 책상 데스크 앞과 글쓰던 카페를 벗어나지않았다. 언젠가 영화로 만들기를 바라며 한 출판사에 투고했는데 결과는 겨울에 발표라고 한다. 결과가 어떻든 난 이 과정에 만족한다. 가슴이 조금 넓어졌다고 느낀다. 늘 ‘서른 즈음엔 해야지’ 하고 미루던 작업들을 꺼내서 하나씩 해 나가는 게즐겁다.
해야한다고 못을 박아둔 개인 작업들 중엔 문학도 있고 미술도 있는데, 사람들과 함께 하다보면 매 순간 함께하는 ‘그 사람’들과 꼭 함께 만들어야하는 작품도 있다. 이번 가을에는 같이 연기를 준비하는 친구들과 작은 단편 영화 한 편을 찍기로 했다. 작은 영화지만 보이는 메세지와 열정은 아주 뚜렸했으면 좋겠다. 스물 초반도 아니고, 아직 서른도 아닌 그 중간어디즈음에서 불확실한 상황에도 꿈을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녹여내고 싶다. ‘인연’이란 건 불교 다니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인줄 알았는데 일상의 매 순간들속에 작은 감사함들을 느끼는 일이 많아질 수록 그 말의 의미가 조금 더 각별해진다. 현재에 충실하고, 있는 그대로 포옹할 줄 아는 지혜를 갖기를 원한다.
첫 소설이 될 줄 알았던
<청춘혁명(The Youthquakers )>은 제일 먼저 쓰지를 못했다. 이마 두 번째 소설로 완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경험이나 주변의 실제 벌어진 일들을 소설로 옮기는 일은 감정적 거리감이 필요한데 아직 시간이 덜 흐른 것 같다. 아마 세 번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래서 <1934 Ms.Lee 이여사> 를 먼저 쓰기로 했다. 한국 드라마틱한 근대사를 아우르자면 철저한 역사고증을 위해 녹취와 역사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지만 그래도 완벽한 픽션이기에 감정적 부담은 덜 하다.
영화를 찍을 땐 그 대본에만 온 집중을 하느라 다른 잡생각이 나지 않지만, 촬영을 마치고나면 찾아오는 공허감에 마음이갈팡질팡할 때가 있다. 문학은 그런 시간을 메우기 위한 내 나름의 습관이다. 다른 이의 세계를 읽기도 하고, 내가 상상한세계를 종이위에 풀어나가기도 하면서 캐릭터를 경험하는 시간이 촬영장 밖으로도 연장된다. 그리고 내가 뭘 그려야할지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요즘은 크게 페인팅을 벌리지 않고 있는데, 대신에 작은 드로잉들을 계속 하고 있다. 부담이 없어서 좋다.장수가 모이면 몰아서 페인팅을 할 계획이다.
<도쿄타워>를 보면서 왜 무사시노 미술대학 나온 사람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단골출연하는 칸영화제 배우가 되었을까? 하는 물음의 답을 봤다. (*릴리 프랭키는 도쿄타워 작가이면서 영화배우고, 그림을 그리며 일러스트레이터로도 활동중이다.)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기도 하고, 그림들을 그려 팔거나 촬영장에 가서 출연료나 광고모델비를 받으며 생활은 어찌어찌 흘러간다. 그냥 매 주, 매 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냥 다 한다. 불안하다. 대신에 작품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가는 날은 없이 산다는 거, 딱 그거 하나 좋다. 작년 이맘때즈음 퇴사를 하고, 무작정 한독립영화 촬영장에 가서 연출부도 하고 단역도 하고 그랬는데, 그렇게1년을 살아보니까 다음달엔 ‘어떡하지?’ 전전긍긍하면 그 다음주엔 반드시 해결할 구멍이 생겼다. 남들한테 막 추천할 만한 삶은 아닌데, 그래도 스스로는 삶의 구력이 생기면서 자신감이 좀 붙은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은 환경탓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태도를 선택하는지에 달렸다. 주어진 궤도와 속도에 맞춰 끙끙 거리기 보다는 여기 저기 구경하면서 내 맘대로 사니까 정신 만큼은 자유롭고 편하다. 월급 받을 땐그만큼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쓸데없이 물욕만 커졌는데 요즘은 크게 사치만 안하면 만족하고 산다. 물건 갖는 것 보다 작품 만들며 사는게 더 좋으니까 뭐 하나는 포기를 해야한다. 사람은 손과 팔이 두 개 뿐이라 원을 하나밖에 못만든다. 그 품 안에 안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필요한 그 한 두 가지를 위해 다른 건 희생하기 마련이다. 그게 건강이 될 수도있고, 돈이나 기회, 직장,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내 시간, 휴식, 창작욕이 될 수도 있다. 뭘 안고 갈 건지는 내가 선택하면 된다. 거기에 맞은 책임을 지면서. 어른이 되는 준비를 하는 건 온갖 달고 쓴 것들을 다 먹고 소화시키는 것 같다. 그러다보면 뭐가 나에게 좋은지, 안 맞는지 알게 되겠지. 한 번 뱉어낸 건 다신 입에 넣지 않게 되는 것 만으로도 쓴 경험엔 가치가있다.
11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3 years
Text
헝가리 영화 <스물 Twenty, Húsz (2018)>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망자의 여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만나는 지난 날의 진실과 과오들.
​ 안개 낀 눈 밭을 맨 발로 걷는 한 늙은 남자의 걸음과 스치는 과거 씬 들이 혼재되어 보여질 때 3초 정도 고민한다. '헝가리 버젼의 <신과 함께>'인가? 망자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놓은 다리를 맨발로 건너는 그 순간에 신비한 눈동자를 지닌 어린 소녀가 나타난다.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해도 낯설지 않을 만큼 설 숲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울리게 요정같이 등장해 남자에게 말을 건다. '맨발이네요?', '신발을 잃어버렸어.', '거짓말', '돌아가요!'
어디로 돌아가라는 걸까? 맨발(Bare foot)과 신발이 상징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발이 더러워졌어요.', '벗으렴.'
내 또래의 취준생들이 매일 '이력서' 쓰고 있다. 履歷書 (밟을 리, 지날 력, 글 서). 지난 날 밟아 온 길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의미다. 발자취라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生의 시간을 종종 이렇게 발걸음에 비유하곤 하는데, 헝가리 영화 <스물 Twenty, Húsz (2018)>는 이러한 메타포 (Metaphor)를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카메라가 시종일관 더러워진 구두를 신은 발과 맨 발을 비추며 보여준다. 신발이 지난 날 걸어온 인생이라면 얼룩은 Sin(죄)이다. 남자의 꿈 속 장면으로 등장하는 젊은 날의 장난같은 섹스와 임신한 여자를 버리고 맨발로 도망쳤던 일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 지나간다. 꿈 속에서 남자는 만삭인 그녀의 배를 쇠막대기로 마구 친다. 꿈이 깨자 남자는 두려움에 그 곳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자 늙은 여자가 말을 건다. '맨 발인데? (그러고 어딜가?)' 남자는 신발이 없어서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없다.
Abortion. 옛 시대의 낙태에 대하여. . . 히스토리 속에 감추어졌던 자기고백적 허스토리
남자가 도망치고, 홀로 남겨졌던 여자의 자기 고백적 이야기. 여자는 그가 모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직하게 읊조린다. 배가 자꾸 불러오자 양잿물을 마시고, 끔찍한 양의 식초를 들이켜고, 어떤 여자는 화약을 먹으라고 했다. 산파는 바늘로 여자의 배를 찔렀다. 이야기를 마친 노파가 그에게 소리친다.
'어서 나를 찍어! 뭘 주저하는 거니?' 청년의 모습을 한 '나'가 셔터를 누르자 마침내 남자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도 죽음의 땅도 아닌 그 중간 어느 세계(연옥)에서 지난 날의 죄를 마주하고 '신발'을 찾아 죽음의 강을 건넌다. 아니, 정확히는 '신발(sin, 죄, 진실)'을 찾고, 그 신발을 품에 안은 그녀를 뒤에 그림자처럼 데리고 어린 소녀를 따라 그 강을 건넌다.
메세지와 상징이 강한 영화는 기록으로서의 영화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작년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상은 '당신들 영화가 받았어야 한다며' 겸손히 스포트라이트를 돌린 영화 <불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극장에서 봤을 때 옛 유럽세계에서 여성들을 낙태하던 방식이 스크린에 그대로 재현되는 장면을 보고 눈을 감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다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같은 여성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나의 내면이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 나를 대입하여 시뮬레이션 하는 데 1/10초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문학 시간에 글로 배운 여성문학과 영화로 보는 역사는 시신경에 파고드는 자극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요즘은 낙태를 하네 마네, 개인의 자유와 신념을 놓고, 법 폐지 문제로 싸우는데... 그 시절에는 목숨이 달린 문제 였다. 잘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현대에 와서라도 편집되어 재현되는 '그 이야기들이' 오감으로 듣고 보는 역사의 한 조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아니면 우리는 그 시절 허스토리를 알 수 없다. 혹자는 '영화는 오락물인데 왜 여가시간에 마저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봐야하나'하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소리다. 팝콘 먹으면서 볼 영화는 아니니까. 하지만... 마지막 컷, 그 눈동자를 마주하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나이든 어느 여자가 한 많은 눈으로 앞을 응시하면서 20을 세자, 죽음의 강을 지키는 정령같은 소녀가 손을 그녀의 입에 댄다. 그러자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숨을 거둔다. Húsz 호운스. 소녀가 속삭이듯이, 마지막으로 (그녀를 대신해) 20 을 말한다. 눈 감고 20을 세고 있어봐! 하고 도망갔던 남자를 기다리던 젊은 날, 그녀의 시간이 그제서야 멈춘다. 우리는 이런 시간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침묵속에 묻혀있던 허스토리를 마주하고, 들어야 한다.이런 영화들도 세상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기 위한 기록으로서.
남자의 죄의식의 구현인가? vs 침묵속에 감춰진 한중록인가?
방금 전까지 그룹콜을 하며 친구 두명과 이 영화의 해석에 대한 열띈 토론을 했다. 한 시간이 훌쩍 흘렀더라. 이미 전화하기 전에도 둘이서 한 시간을 토론중이었다더라. 확실히 이런 류의 영화를 놓고, 남성과 여성의 시선과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영화 속 여러 장치들을 해석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느라 한 번 보면 스크롤로 두 번, 세 번, 네 번 보게되는 영화다. 한 번 보시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시도해 보시길! 원한다면 그 해석을 <독자와의 대화>나 <독자의 질문> 형식으로 메일링 하셔도 좋습니다. (당분간은 영화 리뷰 칼럼을 꾸준히 써서 업로드할 예정이니 여러 씨네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P.S. 조만간 영어로도 올리겠습니다. 오늘 몰아서 쓰려고 했는데 너무 긴 하루였네요...:) 다들 설 연휴 잘 보내세요~!
February 10, 2021 (1:00am)
양혜린 Hyerin Yang
9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4 years
Text
종이꽃
Tumblr media Tumblr media
 일요일이었나 촬영장에 갔다가 캐리어 끌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허해서 집 근처 예술영화 위주로만 상영하는 극장에 시간대가 엇비슷한 것 두 개 중에서 고르다가 찍어서 봤다. 나중으로 미룬 영화는 ‘프록시마 프로젝트' 였다. 에바 그린 언니는 영원한 청춘 스타일 것 같은데 벌써 엄마역할 이라니... 우주 비행사 엄마에 딸이 포스터 메인인 걸 보니... 인터스텔라의 모성애 버젼인가... 하면서 우선은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안성기 배우의 영화를 먼저 보기로 했다. 
 처음 몇 시퀀스가 지나는 동안에는 카메라의 핸드헬드도 심하고, 영안실의 시체 눈이 파르르 떨리는데... 음...저거 혹시 의도된 연출일까...사후경직으로 봐야될까...하면서 불안불안해 하면서 봤지만... 나중에는 ‘안성기’ 라는 한 인간 남자만 보인다. 다섯 살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한 평생 배우로 살아온 인간, 남자, 아버지의 얼굴은 러닝타임이 어느정도 흐른 후에 ‘아, 저 배우 연기하고 있구나' 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서사에 몰입하게 만들 정도로 ‘이 땅의 역사가 스며베인 얼굴' 그 자체였다. 
 신파로 흘러갈 수 있는 부분에서는 절제를 하고, 뻔한 정치 코드로 흘러갈 수 있는 장면에서는 인간적인 감정을 우선한다. 삶의 회한, 죄책���, 연민, 책임감, 잠시 기뻤던 순간들을 그리며 간직하는 마음, 침묵 속에 그 모든 걸 잔잔하게 표현하는 그의 관록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지친 하루 끝에 위로를 받고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영화다. 
 어려서는 ‘애들은 이런거 보는 거 아니야' 라고 어른들이 장례식에 못 가게 해서 내가 진심으로 목놓아 운 장례식은 구한말에도 끝까지 머리카락을 안 자르 시고, 아침마다 금 비녀로 곱게 쪽을 진 머리에 명주적삼을 차려입으시며 양갓집 규수로 평생을 사셨던 증조할머니가 93세에 돌아가신 날 뿐이었다. 그 때가 열 살이었는데 3일 장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서도 급식먹으러 선 줄에서 엉엉 울어서 친구가 어깨를 토닥여줬던 기억이 남아있다. 20대가 되니 ‘젊은 아가씨는 이런데 오는 거 아니야'라면서 또 장례식에 잘 못오게 해서 지난 번에 엄마의 사촌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나마 우리 학교 병원 장례식장이어서 시험기간에 학교랑 왔다갔다 하면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염’ 을 모른다. 몰랐다. 우리 어릴 때 배운 ‘바른생활', ‘생활의 길잡이', 혹은 ‘가정' 이나 ‘도덕' 교과서에서 어렴풋이 한국인의 장례문화와 예절에 대해 그림으로 본 것 같은 기억은 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솔직히... 장의사가 아닌데 고인의 몸을 닦는 일을 직접 볼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스크린을 통해 그 과정을 보면서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우리의 근본,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문화를 눈과 마음으로 알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상여처럼 지나가는 행렬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데뷔작 ‘환상의 빛'의 익스트림 풀샷이 겹쳐보였는데 클로즈업과 풀샷이 주는 차이가 이런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와의 거리는 영화의 톤을 결정하는데 대사 만큼이나 중요한 것 같다.
 첫영화를 털고나서는 22-24살 즈음 가벼운 플롯만 정리해두었던 두 개의 Fiction 픽션을 꺼내어 살을 붙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애매하게 픽션이라고 한 이유는... 아직은 이게 소설인지 영화 시나리오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희곡은 아니라는 것. 그저 스토리텔러로서 쓰고 있다. 두 이야기 중 하나가 엄마의 죽음으로 첫 장면이 시작하는 war correspondent 전쟁터에 나가 사진을 찍는 한 포토 저널리스트의 이야기다. ( ‘종군기자'라는 단어가 일제의 잔재에 의미가 왜곡된 것이라는 썰이 있어서 ‘전쟁 사진 기자', ‘전선 특파원’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 같다.) 오랜시간 타지에 나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모친의 장례를 치룰 때 이방인으로서 겪는 내면의 심리같은 것을 그리고 있는데 마침 장례식에 대한 부분을 쓰다가 이 영화를 보니까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영화를 통해 얻는 감수성 같은 것은 인터넷 검색으로는 나오지 않는 디테일이니까. . .
 영화의 마지막 컷은 주인공의 얼굴이었다. 종이꽃을 접는 컷으로 시작해 장의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늘 사람의 편에 서서 돌보고, 어루어 만지며 마지막까지 정과 성을 다한다.’ 라는 신념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한 남자의 얼굴이다. 얼굴이 곧 메세지가되는 좋은 배우, 좋은 소재였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어렴풋하게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의 골목길 감성이 좋았는데, 세련된 빌딩숲 속에서 잊어버린 그런 ‘향수 (鄕愁)’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5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연기한 여배우가 나와 동갑이었다.
이십대 중반인 지금,
여전히 스물처럼 청춘이긴 한데 현실이라는 삶의 단면과 그 쓴 맛을 좀 맛보고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하는 나이에 이 영화는 거창하게 직설적인 위로의 말은 없지만 がんばれ (간바레) 힘내라, 화이팅.
도쿄시내 한 복판의 육교에서 혼자 버스킹하며 노래부르는 젊은 여자의 노래가사처럼 그냥 들려서,보여서, 계속 듣고 보다보니까 스며든다.
간바레.
철없는 열아홉 스물이었다면 가만히 있어도 자신감 넘쳐서 이런 이야기가 구질구질 하다며 이해 못했을 영화🎬 감독의 전작들을 좋아했지만 이번 작품은 피부로 체험하는 지금 현재의 우리 이야기여서 마음에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Tumblr media
11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암스테르담에서 온 포스트 카드。
어느 날 아침 어느 영화를 제일 좋아하냐고, 좋아하는 감독은 누구냐며 꼬치꼬치 묻길래 내일 아침에 씨네마테크 같은 영화 뮤지움에 간다고 메세지가 와있길래 비몽사몽 답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네 멋대로 해라> Breathless랑 프랑수와 트뤼포 감독의 400 blows같은 누벨바그 영화에 꽂혀서 영화를 시작했다는 식으로 보냈던 것 같다.
쓰다보니 길어져서 거의 씨네21 코너 몇 개 연재글 수준의 페이지가 되었다. . .ㅎ 프랑스 칸영화제 출신 감독들의 영화�� 중화권 제5세대 홍콩예술영화감독들 영화까지 다 언급하려다가 보니까 거의 칼럼이 되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잠을 깬 그 애가 거의 소논문을 보낸거 아니냐며 웃었다.
그 뒤론 잊어버리고 영화작업이랑 학교랑 여러가지 일들로 이것저것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데. . .집에 빈티지화된 포스트 카드가 도착했다. 내용은 자기삘에 심취해서 쓴 알 수 없는 해독 불가능 글 ㅋ ㅋ
포스트 카드가 누벨바그에 장 뤽 고다르 실루엣이다:)
그래서 물어봤었구나. . .✍🏻🎬
문득 네가 그리워져서 핸드폰을 뒤지는데 왜 나는 너한테 사진 찍어도 되냐고 한 번을 못 물어봤을까. . .? 다른 친구들 사진은 묻지도 않고 그렇게 잘 찍으면서.
그래서 기억의 잔상을 따라 그 애의 얼굴을 그렸다.
그림을 느리게 발음하면 그리움인데. . .
옛날 사람들은 카메라가 없어서 그리움을 기억하려고 그림을 그렸나보다. 🎨 언젠가 너와의 우정도 까마득한 추억으로만 남겠지. . . 살다보면
4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Photo
Tumblr media
Xi and her mate, Seung Hwa, Sun-hwa Arts High School📷
Il ford HP5, minolta
Film Photography
5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Photo
Tumblr media
Who is the strongest person in the world when a girl learns how to ride a bicycle? 📷
2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Photo
Tumblr media Tumblr media
1 note · View note
hyerinyang · 5 years
Photo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An Old Coulple (어느 노부부)
침묵속에 혼자 길을 것다보면 종종 가슴깊은 곳이 뭉클해지는 장면을 자주 본다.
그들에게는 그저 지난 몇 십년간 그래왔듯 평범한 일상의 퍼즐 한 조각일 뿐이겠지만 보는 내내 명치깨 어딘가가 뭉클하게 울렸다. 요즘같이 뭐든 것들이 너무 쉽고, 금방금방 변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저런 한결같음은 어쩌면 가장 지키기 힘든 고결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사진과 짧은 노트
5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Photo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1 note · View note
hyerinyang · 5 year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
봄 하늘의 뭉게구름이 정말 예뻤다:)
5 notes · View notes
hyerinyang · 5 years
Text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봄의 온기。
3 notes · View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