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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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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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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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쓴다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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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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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박일만
 
달랑 이불 하나가 전부인 산을 베고 누워
반으로 내 온 생을 덮습니다
 
반을 펴 한쪽은 요로
반을 접어 한쪽은 당신으로
 
당신을 두고 여러 날 잠을 설쳤을 적에
모로 누워 반쪽을 비워두는 일 잦았습니다
 
대피소마다 나는 당신의
반을 접어 덮고 잡니다
 
한쪽이 한쪽을 만나도 하나가 되는
그 넓은 우주가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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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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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 있다          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 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 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쫒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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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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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서덕준
 
결말이 따뜻한 한 편의 소설 속
너와 내가 주인공이길 바랐지만
너는 행복과 슬픔, 그리고 일생을 읽는 동안
나는 등장하지 않았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지문에 눈물만 묻혀가며
말없이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은 고작
‘너를 앓으며 사랑했던 소년 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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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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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사랑          송해월
 
저 새
제 몸 타 들어 가는 줄 모르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고
밤 새는
달에게로 날아가
제 주둥이 데는 줄 모르고
달을 쪼아 먹었다
 
나는 
불 살라 질 줄 알면서
너에게로 갔고
너의 이름 한 번 삼킬 때마다
가슴 불 지짐 당하는 통증으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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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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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박성우
 
어느 애벌레가 뚫고 나갔을까
이 밤의 유일한 탈출구,
 
함께 빠져나갈 그대 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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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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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나태주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요,
 
나의 그리움은
나 혼자만의 것으로 차고 넘치니까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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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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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왜 유가 아니라 무인가?       함성호
 
어머니 전 혼자예요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공중을 혼자 떠도는 비눗방울처럼
무섭고 고독해요
나는 곧 터져버려 우주 곳곳에 흩어지겠지요
아무도 제 소멸을 슬퍼하지 않아요
어머니 전 혼자예요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고요히 솟아오르는 말불버섯 홀씨처럼 
어둡고 축축해요
나는 곧 지구 부피의 여덟 배로 자랄거예요
아무도 이 거대한 가벼움을 우려하지 않아요
 
여기에는 좁쌀알만 한 빛도
쓰레기 같은 정신도 없어요
혼자 생각했어요
연기(緣起)가 없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우연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단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타이가의 호수에서 보았지요
안녕하세요? 하고 긴 꼬리를 그으며
북반구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을
안녕? 나는 무사해
어둠이 내 유일한 인사였어요
이것이 내 유일한 빛이었어요
 
나의 우주에 겨울이 오고 있어요
나는 우주의 먼지로 사라져 다시
어느 별의 일부가 될 거예요
 
새로울
나의 우주는 아름다울까요?
 
혼자 생각해봐요
이 무한에 내릴 흰 눈에 대해서
소리도 없이,
소·리·도·없·이·내·릴·흰·눈
에 대해서
 
어머니 전 혼자예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울지요
나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누구에게든 알려주고 싶어요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도 
아름다움은 있을까요?
 
거기에, 거기에 고여 있을까요?
존재가 없는 연기(緣起)처럼
검은 구멍처럼
 
어머니 전 혼자예요
쇠락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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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8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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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수배자 제1호          심은섭
 
그는 겨울을 살해한 사형수다
 
온 몸에 살구꽃 문신이 새겨져 있다
어느 그믐날, 2월의 담장을 넘어 탈옥하여 긴급 지명수배되었고, 
인상착의는 벚꽃을 빼닮았다 
새들은 몽타주가 인쇄된 수배 전단지를 물어다 온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순찰을 돌던 배추흰나비가 그를 체포했을 때 동물원의 침팬지들이 술렁거렸다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전신엔 태양의 모발이 바늘처럼 자랐고, 
동면에서 깨어난 비단뱀이 사냥을 위해 앞발을 손질했다.
 
그가 들판에 구금되던 날, 자폐증을 앓던 패랭이꽃은 우울의 끝이라고 단정했고, 
흰 피를 흘리며 순교를 꿈꾸던 암탉은 일곱 마리의 어둠을 부화했다 
 
벽난로가 이마를 식힌다 
내 목덜미를 할퀴던 바람도 방죽에 앉아 손톱을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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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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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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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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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박노해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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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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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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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1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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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 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 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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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1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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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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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1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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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꽃으로          유영금
 
숲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고혹스럽게 부드럽게
휘감아오는 누가 있어 뒤돌아보니
하늘가 수런거리는 햇살 이더군.
귓부리를 물고 속삭였지
하늘 귀퉁이 한 뼘 내 줘, 죽도록 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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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lduck · 1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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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한 밤          한용운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꺾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 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죽음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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