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blacksmithhh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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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훈육에 대하여
자기훈육이란, 추상적 자아를 조형하고자 주체의 내면이라는 공간에서 시간과의 경쟁을 벌이는 행위를 뜻한다. 이와는 달리, 자기계발은 가시적이어서 구체적인 성과를 얻고자 속된 세상에서 타인과의 경쟁을 일삼는 행동이다.
자기훈육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양질의 애정, 타고난 집중력, 그리고 자제력을 그 바탕으로 한다. 엄격한 부친이 제기한 가시적 목표를 획득하여 칭찬을 받고자 허덕이는 와중에, 지칠 때 마다 모친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지지로 위로 받았던 경험이 없이 자기훈육의 매커니즘을 내면화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부모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나는 이유 없이 사랑 받고 있구나’라는 신뢰가 암묵적으로 형성돼 있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우선시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자기훈육이라는 내면의 알고리즘을 작동시킬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어렸을 적 부모가 저 멀리 던져놓은 공만 쫓아가서 재빨리 물어오던, 마치 야생의 짐승과도 같았던 아이가 이제야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딱 그만치 공을 던져 물어오는 자기훈육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논의를 확장해보자면, 이렇듯 무수히 반복된, 그리고 반복될 자기훈육의 순간마다 자신이 지향하는 의미를 능동적으로 부여함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감정 상태를 일컬어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기계발서나 행복론이 아니다. 외려 일상에서의 자기훈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자존감을 확장하고 자기신뢰를 제고하여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그렇게 다시금 자아를 주체적으로 추동해나가는 작은 경험들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이 다년간 축적되어 자연스레 몸에 체득된 자기훈육의 메커니즘은,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뇌의 업그레이드와 맞물리며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조건 지우게 된다.
문제는 그 시의적절함에 대한 논의가 삼십 대 초반이 지나는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추신_
공부에는 때가 있고 도전할 기회는 제한돼 있으며, 시간은 흐르는데 가야 할 길은 구만 리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뇌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오늘 하루도 성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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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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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이 곧 인생이다
2015. 5. 11 여전히 포기하는 일은 어렵다. 포기의 결과가 두렵지는 않다. 다만 선택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불안한 것이다. 영화 <스물>에서 전업 웹툰 작가의 꿈을 접은 주인공이 말한다. “너희는 포기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몰라.” 그는 포기가 선택의 부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포기는 선택의 결과이지 그것의 부재가 아니다. 누군가 미합중국 대통령이 되기를 포기했다고 말한다면 주위의 비웃음을 살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애초에 그는 그렇게 되고자 선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무지하거나 어리석다고 말한다. 삶이란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선택이 누적된 결과이다. 더 나은 삶은 더 나은 선택을 통해서 가능하다. 노력과 운도 중요하지만 선택의 중요성과 비교한다면 부차적이다. 실제로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목표를 위해 합당한 노력을 기울이기란 쉽지 않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행운의 여신이 결코 미소 지어주지 않듯 노력 없이 개선된 미래는 다가오지 않는다. 선택의 부재는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 대한 방기에 다름 아니다. 일상에서 하는 고민의 질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 우리의 고민들 대부분은 결국 선택의 문제로 수렴한다. 이것을 선택할 것인가, 저것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이는 사려 깊은 신중함의 끝에 전략적 결론을 도출해내지만 또 다른 이는 신중함과 게으름을 혼동하고 결론과 공상을 착각한 채 서서히 도태될 것이다. 영화 <더 그레이트 뷰티>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Up with life, down with reminiscence”. 인생과 함께 우리는 올라가고, 회한에 잠겨 다시금 내려온다. 적절한 순간의 적절한 고민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것은 아닐까. 선택의 시의적절함은 해당 선택의 비용과 편익의 형량으로 결정된다. 일정 연령 이전의 남녀에게 결혼의 비용은 낮고 편익은 높다. 그 시기가 지나면 비용은 터무니 없이 높아지는 반면 편익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우리는 비용과 편익이 크게 엇갈리기 시작하는 지점을 가리켜 결혼적령기라 부른다. 이렇게 선택의 ‘시의’가 가려진다. 한편 선택의 ‘적절함’은 선택이 가져올 결과로 판단해볼 수 있다. 시시한 목표는 곧잘 지루해지고 성과는 미미하다. 거창한 목표는 쉽게 두려움을 야기해 유의미한 동기부여를 방해한다. 사람들은 본성상 공포와 불안에 취약하다. 그들이 작은 도박을 거듭하는 이유다. 그렇게 쉬운 목표를 세우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 평범함 결과를 얻는다. “큰 기회에 도달하기도 전에 인내심은 바닥나고 막상 큰 기회에 당면해서는 확신 같은 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서른을 앞두고 고민이 깊어지는 까닭은 다시금 선택과 포기의 갈림길에 서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삶은 시험 한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다가오는 미래에는 그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안온한 선택은 결코 안온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혹한 선택이라고 항상 영광스런 미래를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선택 그 자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선택이 없인 실패가 없지만 실패 없이 어떠한 성취도 없다. 실패한다고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지만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고 성공은 요령부득이다.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포기는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택을 선택할 것인가, 포기를 선택할 것인가. 이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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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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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결산
2015년은 한국의 제3세계화 원년이었다. 그리고 2016년, 나라의 정치수준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고 경제상황은 나날이 악화됐으며 공공의식은 실종되었고 약자 혐오는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개인적으로도 정치에 관심을 거둔지 오래다. 신호위반도 수차례 한 듯 하고 주변의 여자들에게 공정하게 대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가는 남성들 대부분은 손을 씻지 않는다. 처음에는 불쾌감을 느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피곤하다. 버스 안에서는 백팩이 마치 자기 몸인 양 여기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옆사람을 툭 치고 지나가도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다.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전세 낸 듯 떠드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고 그마저도 절반은 비속어다. 스테이크만 썰 줄 알지 와인 한 잔 주문할 줄 모른다. 물론 김밥천국에서 김치를 무한리필하는 것은 큰 죄가 아니다. 다만 보기에 민망할 뿐이다. 이 나라에서 민망함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누구나가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 아무래도 그게 시대정신인가 보다.
알파고가 세간의 화제이다. 유서 깊은 반도 냄비근성의 발현일 터이다. 그렇다고 마냥 외면하기에는 조금 더 짚어볼 만한 구석들이 있다. 알파고는 단지 한국의 부실한 기초과학 인프라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세계화라는 렌즈로 들여다봐야 그 실상이 바로 보인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세계화의 원년을 선포했다. 그러나 바로 지금 2016년 세계화의 물결은 물질적으로, 그래서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네 삶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다.
저녁 없는 삶이 불가능한 것은 무능한 정치인 혹은 부패한 기업가 때문만이 아니다. 하필이면 지금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경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노동집약적 산업에 속해있고 중소기업에서 종사하고 있다. 이래서는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추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세계화는 끊임없는 분업의 연속이다. 이제 한국의 일을 중국이 대신한다. 한국인은 밤새 일하지만 손에 쥐는 것은 보잘 것 없다. 효율성의 추구는 시장경제의 철의 법칙이다. 세계화의 편익은 전 세계적으로는 상당히 고르게 분배될지 모르나 한 국가 내에서는 그렇지 않다.
알파고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의 세계화다. 바로 수학과 컴퓨터로 대변되는 하이테크 산업의 전지구화이다. 현재 세계적인 갑부들의 다수는 수학이나 컴퓨터 분야에서 발군의 재능을 드러낸 이들이다. 현실세계에서 압도적인 비율의 부가가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창출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소득과 노동소득 간 축적속도에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소득 불평등 이슈이다. 하지만 자본소득 역시 균등하게 축적되진 않는다. 소위 0.1%와 1% 사이의 불평등 이슈이다.
작금에 눈에 띄는 소득 불평등의 원인은 바로 공교육이 기술 진보를 미처 다 커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소수의 수재들은 공교육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기술 진보를 캐치업하고 이를 확장해 나간다. 그들은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를 위시하여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 등이 그러하다. 돈을 쓸어 담는 자본가는 속된 말로 너디한 공돌이들이다.
이러한 소득의 불평등이 현재 만연해 있는 공부중독 현상을 잘 설명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화야말로 공부중독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기술 진보는 세계화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이제는 평생직장도 없고 단기간 안에 혁신되지 않는 기술도 없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말하자면 끊임없는 공부와 혁신만이 장기적인 생존의 비결이 되었다. 하지현과 엄기호는 공부중독의 디톡스를 외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구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트레이더 김동조의 말처럼 공부중독은 어쩔 수 없이 글로벌한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알파고가 우리에게 던진 충격은 인간 대 기계의 대립이 아니라 세계화에서 뒤쳐져 버린 한국에 예비된 고단한 미래의 가시화에 기인한다. 이것은 교육의 실패이고 정책의 실패이며, 그래서 결국은 개인의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길게 이야기할 여력이 없으니 짧게만 짚고 넘어가겠다. 한국의 정치판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유능한 정치인이 아니다. 최소한의 합리성이다. 합리성은 주로 타협으로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한국은 강고한 이데올로기 사회인지라 타협은 곧 패배로 번역된다. 애초에 합리성이 들어설 구석이 별로 없다.
반대로 공무원 사회에 과잉돼 있는 것은 유교적 집단주의이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여기에서 능력은 추론되는 것이지 역으로 입증되지는 않는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의 부재까지를 계산에 넣어 시뮬레이션해보면 왜 이 나라에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여자혐오, 이른바 여혐의 배경에는 경제 불평등의 심화가 놓여 있다. 제 몸값을 올리지 못하는 남성들이 갖고 싶으나 가지지 못하는 여자들의 가격을 마구 후려치는 것이 현상의 본질이다. 하지만 여혐의 뿌리는 아무래도 문명화되지 않는 전근대적인 습속이라고 봐야한다. 문명은 계몽의 산물이다. 계몽은 훈육의 결과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인터넷 사회로 이행해 버린 지 오래고 반지성주의는 이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인)은 문명과 야만 사이의 기로에 서 있지만 둘러보건대 방향은 이미 정해진 듯 보인다.
이것 이외에도 한국에서 어떠한 형태나 종류를 ��문하고 축적이란 참으로 요원한 일이다. 여전히 번역은 홀대 받고 아카이빙은 공과 사 모두에서 등한시되고 있으며 (일본사회가 갖고 있는) 개개인의 장인정신마저 부재하니 전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성취나 깊이 있는 성찰은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 지루한 악순환의 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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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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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이라는 현상에 관하여(2)
2016. 5. 24 이번 사건은 여혐살인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정신질환 자체가 환자가 속해있는 사회정치적 환경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박사는 용의자의 여성혐오적 언사가 망상 때문이었다 해도 그러한 망상에는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사회 내 여성혐오 현상이 없었다면 그는 다른 종류의 망상을 가졌을 겁니다.     통계로 입증된 바에 따르면 정신병을 가진 사람의 범죄율은 정신병이 없는 사람에 비해 결코 높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조현병과 이번 사건의 연결고리는 직관과 달리 그리 매끄럽지 않아요. 아마도 이 사건을 계기로 여혐의 수위는 그대로일테지만 조현병 환자 혐오는 크게 늘어나겠죠. 이건, 그냥 클리셰입니다. '전국민 수건 돌리기 게임'인 셈이죠.     혐오범죄를 입증하기는 어렵습니다. 행위자의 내심을 추단해서 처벌을 강화한다는 논리를 지니기 때문이죠. 예외적으로 독일의 경우 형법에서 혐오발언을 처벌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학살과 나치 전력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죠. 하지만 대개 '상징적' 의미의 입법에 그치기 십상입니다. 사람의 불량한 내면을 근거로 처벌하는 일은 윤리적 직관에 반하기 때문이죠. 범죄전문가들이 혐오 범죄로 분류하길 주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차피 혐오 범죄는 가중처벌요건이기도 하고요.     결국 사회적 맥락에서 봤을 때 증오범죄라고 볼 수 있는데 범죄학적 관점이나 법적 관점에서는 증오범죄가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셈입니다. 이번 사건이 그런 케이스라고, 홍성수 교수는 말하고 있고요. 한국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라는 말이 불쾌하게 들릴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주장보다도 훨씬 더 진실에 근접해 있지요. 성폭력은 "2014년 10만명당 58.2명으로 10년 전보다 2.5배 늘었고", "범죄 불안을 느끼는 여성은 2010년 67.9%에서 2014년 70.6%로 해마다 증가 추세"입니다.     일단의 남성들은 여성들이 아무리 조심해도 결국 찾아내서 위해를 가하고야 맙니다. 공중화장실에서 칼을 들고 여자가 오기를 기다리는 남성을 잠시 상상해보세요. 여성의 손에 죽는 남성보다 그 반대가 월등히 많다는 사실은 새삼 지적하기에도 민망한 일이죠. 여성은 언제나 위험해질 수 있으며 그 가해자의 대부분은 남성입니다. 그런데도 여성들에게만 조심하라고 말한다면 그건 악의적인 위선이에요.       스스로가 잠재적 가해자,라는 '가정'만으로도 한국 남성들은 불편해 합니다. 죄책감을 느끼기 싫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기분과 남의 생존의 위협을 저울에 달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요. 어두운 골목에서 앞서 가는 여성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 조심히 걷는 정도의 불편함은, 그냥 인생의 일부예요. 조심하며 사는 것은 문명인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또한 누구나가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딸로 태어난 죄책감, 게이로 태어난 죄책감, 광주에서 살아남은 죄책감” 등등을 말이죠. 한국 남성의 이름으로 죄책감을 갖지 않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의 남성이 아니라, 한 사회의 구성원이자 성숙한 인격체로서 죄책감을 가지는 건 전혀 부끄러워할 일도, 회피할 일도 아닙니다.    여권의 신장은 이미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파이를 나누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동성혼이나 군복무 자격 논란에서 보듯 이성애자의 권리 포기를 요구하지 않는 경우와는 달라요. 가령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을 줄이려면 남성이 더 많은 가사를 해야겠죠. 여성의 임금을 올리려면 (경제규모가 크게 성장하지 않는 이상) 남성의 임금이 줄어야 합니다.     정말이지 간단한 산수예요.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한 치도 포기하지 않고 여성과 ‘평화롭게’ 공존하겠다는 주장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여성 대 남성의 대결구도는 선동하여 부추기는 게 아니라 그렇게 흘러가야 마땅한 거 였죠. 그런 의미에서 맞은 사람, 강간당한 사람, 살해당한 사람에게,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그야말로 2차 가해입니다.       각종 댓글란의 반응들은, 그러니까 참으로 '한국 남성'스러워요. 마음이 불편하고, 못내 억울하고, 차마 죄책감을 느낄 자신은 없는, 남성들의 목소리로 한 가득이잖아요. 한 여성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한 남성'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이 와중에 말입니다. 불편한 심경은 이해하나 그걸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남자들이 이해해 달라며 징징댈 타이밍이 아닐 뿐이에요. 되려 잠시 입을 다물고 차분하게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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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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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이라는 현상에 관하여(1)
2016. 5. 22
강남역대로 부근에서 한 여성이 무참히 살해당했어요. 명백한 여성혐오범죄입니다. 범인은 걸리는 여성 중 아무나 죽이려 했다고 자백했다지요. 범인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여성혐오범죄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의 공격성은 여성을 비하, 차별, 혐오하는 사회적 맥락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여성혐오는 글로벌한 현상이에요. 세계 어디에서든 경제양극화가 심화되고 계급상승의 기회가 줄어들수록 그 상대적 박탈감은 약자에게 투사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대개 주변에 눈에 띄는 약자는 여성이고요. 한국남성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과거에 비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남성들의 반발심리가 증대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사회에 팽배한 여성혐오의 역사는 유구해요. 조선시대부터 여성은 이등국민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을 가부장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공공재 정도로 인식해 왔어요. 여성들에게 권리보다 의무를, 기회보다 차별을 강요해왔던 이유겠죠.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화학결합하면서 사회 내 여혐의 임계치가 폭발하였고 각종 데이트폭력, 강간, 급기야 살인까지 벌어진게 아닌가 싶어요. 바야흐로 여혐만연풍조가 도래한 셈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다면 적을 만들고 거기에 두려움과 증오의 색깔을 입히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적의 가면은 빨갱이, 전라디언, 조선족 등으로 다양하죠. 하지만 여성을 향한 분노와 혐오는 언제나 그 바탕에 놓여있었어요. 루저녀부터 된장녀, 최근에 김치년까지 라벨은 다르나 여성을 혐오하는 양태는 판에 박은 듯 동일합니다. 남성들의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열등감을 건드리는 여성들을 일반화하고, 가상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라벨링하고, 증오하는 패턴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성들이 쉬이 열등감을 느끼고 공격성을 띄게 된 부분적인 이유는, 한국사회가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올라가는 사회에는 희망이 넘실대지만 내려가는 사회에서는 열등감이 차오르는 법이죠. 남성들은 몰락의 정조를 애써 외면하고 내면의 두려움을 통제하고자 여혐을 택한 셈입니다.  
이제는 여자친구들에게 밤길 조심하고 짧은 미니스커트 입지 말라고, 고나리질하기도 애매해졌습니다. 범인이 강남대로변에서 여자를 죽이려 잠복하고 있는 현실에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는 조언은 (어쩔 수 없이) 이전보다 훨씬 더 위선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죠. 한국남성들이 스스로를 잠재적 가해자로 인지하고 경각심을 갖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변화는 요원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가 적절합니다. 사실 너무나 적절해서 비유라고 할 수도 없어요. 가령 한국 성별임금 격차는 37%로 OECD 기준 최하위에 속합니다. 한국 여성은 연간 근로일 기준으로 95일을 더 일해야 비로소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죠. 병역의 대가로 봐도 지나치게 큰 차이입니다.
또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타고난 기득권을 얻게 됩니다. 여혐을 경계하고 주변의 여성들을 걱정하는 남성들조차 본인의 신변을 걱정하진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주변을 걱정하되 자신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한국남자의 디폴트 값입니다. 미국에서라면 황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 역시 약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겠죠. 황인종남성의 자리에 한국여성을 대입해보면 이해는 굉장히 심플해집니다.
이외에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대결 구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메갈리안의 미러링도 같은 이유로 부정당하고 있죠. 방법론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여기 보라고, 문제가 있다고 고함을 질러대는 단계예요. 정상적인 시스템이라면 귀를 기울이고 생각하는 게 먼저겠죠.“ 
이건 조금 흥미로운데 한국남성들은 외모가 출중한 여성들에게 모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비난의 화살은 자주 반반한 얼굴 덕에 남자 뜯어먹는 여성들에게 향하고 있죠.
지루한 만큼이나 악의적인 패턴입니다. 마치 그녀들이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것 마냥 착각하지만 그렇진 않죠. 기껏해야 저녁대접 받고 소개팅 나가서 콧대 세우는 정도인데 이 과정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성희롱, 성추행, 가격 후려치기를 생각하면 기득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에요. 그리고, 그네들의 가격을 높이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 구애하는 뭇남성들이죠.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예요. 이걸 두고 여성을 탓하면 스마트해 보이긴 힘들죠.
사족 아닌 사족이지만, 최근 AOA 설현의 역사인식 논란을 지켜보면서, 서울대 총장을 지내신 분도 731부대와 마루타를 모르는데 너무들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설현 몸매'를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리던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저런 뭇매를 가하다니, 홍상수 감독이 줌인해도 모자랄 웃픈 현실이죠.  
하수상한 시절이에요. 이럴 때일수록 신체적, 정신적 위생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죠. 그럴려면 경제적으로 안정성을 확보하고 지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해야할텐데 쉽지 않은 노릇입니다. ‘출구없음'이 이런 느낌일까요. 개인적으로 인문학의 효용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향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이러한 믿음이 절실합니다.
곧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는 마당에 인문학적 가치는 기껏해야 잉여로서의 교양이 될 줄 알았는데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비어있는 중심이 되다니. 세상은 요지경이에요. 아무래도 역사의 종말을 논할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문명이냐 야만이냐,를 선택하는 기로에 선 것 같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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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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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종교적 의미
2009. 11. 29
종교개혁은 교리 측면에서 신과 인간의 중개인으로서의 성직자 계층을 부정하며 발발하였고 훗날 개신교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개신교는 카톨릭 교회의 여러 관습들(대사부 판매, 성찬식, 성인숭배 등)을 비판하였고 더 나아가 성상파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개신교의 반발에 카톨릭 교회는 트렌트 공회를 개최하고 예수회의 선교활동도 본격화되면서 일명 반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그 유명한 ‘95테제’를 게시한다. 그는 여러 카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폭로하였는데 그 가운데 면죄부는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대사에 해당한다. 대사(indulgentia)는 라틴어로 ‘은혜, 호의’를 뜻하며 인간의 선행으로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카톨릭 특유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루터를 위시한 개신교 세력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인 성직자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죄의 사함은 오로지 인간들을 위해 피를 흘린 예수의 희생과 사랑으로만 가능하고 여겼다. 따라서 대사부가 “벌을 받지 않게 하고, 죄를 짓도록 허락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하는 면죄”라고 통렬히 비판하였다. 권능도 없는 인간(성직자를 비롯한 카톨릭 교회)이 죄인을 사하려는(대사부 판매 등)관행은 용납되지 않는 월권행위라는 것이었다.   
대사부에는 순례지 방문이 포함돼 있었다. 순례지에서 기도와 회개를 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골자인데 이에 순례지에서는 대사를 홍보, 선전하기 위해 성인이 그려진 동판화를 제작하여 판매하곤 하였다.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사람들은 동판화의 성인 아이콘 자체를 숭배하게 되었고 루터는 이러한 성상 및 아이콘 숭배를 비판하게 된다. 또한 카톨릭에서는 성변화(transubstantiatio)라고 하여, 성찬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어올리는 성체거양(elevatio)의 순간 빵과 포도주가 말 그대로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루터는 성찬식에서 성체변화는 인정하나 그것은 예수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구원에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이므로 숭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상징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마지막으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숭배가 문제가 되었다. 성모 마리아는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에 대한 믿음으로 대중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이에 루터는 이러한 관념 역시 혐오스러운 우상으로 변질된다며 카톨릭의 전통을 부정하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갈등은 자연스레 성상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성상파괴는 루터보다는 칼쉬타트(1480-1541)가 적극적으로 행하였다. 그는 <성상제거에 관하여>라는 책자에서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성상파괴를 옹호한다. 첫째로 그는 아이콘이 구약성서의 십계명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이콘에 행한 경배행위가 원대상으로 전이된다는 기존의 성상옹호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둘째로 성상옹호론이 내세우던 경배와 숭배의 구별이 용이하지 않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층위의 행위들이지만 일반 신도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즉 기표(성상)와 기의(원대상 대한 믿음)이 모호해진다는 지적이다. 셋째로 성화가 문맹자들에게 도해된 성서이며 교육적 기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성화옹호론마저 효용이 없다며 부정한다. 루터는 성화의 내러티브적 용도는 인정하였으나 그는 이마저도 거짓이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강력한 저항에 맞서서 카톨릭 진영에서 요하네스 엑이 반론을 제기한다. 엑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이미지를 제거하지 않는 데에 대하여>라는 다소 긴 제목의 책자에서 칼쉬타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선 십계명은 구약시대의 산물로 예수가 탄생하면서 시작된 신약시대에 아이콘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즉 아이콘은 단순한 우상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이해시키는 물적 수단으로써 예수 자신이 신의 이미지를 뜻하는 아이콘으로 지상에 내려온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지적한다. 둘��로 베로니카 이야기(예수가 십자가 고난을 받던 중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니 손수건에 예수의 형상이 찍혔다.)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가 이미지의 사용을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아이콘의 세가지 효용을 내세웠다. 아이콘은 신도들이 그것을 봄으로써 그 대상을 기억하고, 본받으려하며, 이를 통해 신앙심이 성장하게 한다고 말하면서 칼쉬타트가 부정했던 경배행위의 원대상으로의 전이라는 동방교부들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재천명한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에 의해 제기된 비판에 직면하여 카톨릭 교회는 좀 더 체계적인 대응을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1545년부터 1563년 로마 북부의 트렌트에서 공회가 개최된다. 애초 취지는 개신교와 카톨릭의 갈등을 봉합하고자 함이었으나 주로 이탈리아 주교들이 대거 참석하게 되면서 공회의 결론은 교황의 권위를 높이고, 카톨릭 전통을 재확립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공회에서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한다. 첫째 교회라는 기관의 체제를 엄격히 확립할 것, 둘째 전통 카톨릭을 알리고 교세 확장을 할 것. 트렌트 공회가 교리상 중요한 문제들에 내린 결론을 보자면 선행(good deed)이 아닌 구원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는다는 개신교의 교리를 부정하고 카톨릭 전통을 강조하였으며, 성서만을 권위로 하는 개신교에 대하여 트렌트 공회는 교회의 전통 또한 신앙의 근거로 확립한다. 따라서 초대교회에서 옹호한 교황의 권위를 비롯하여 성찬식에 대한 견해, 성인숭배 등을 정당화한다. 또한 아이콘의 사용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움직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예수회의 탄생이다. 
시기상 예수회의 탄생이 앞서나 내용 흐름상 트렌트 공회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예수회의 영성적 특성과 방향성은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수립되었다. 성 이그나티우스는 성인이 되자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1521년 팜플라 전투에도 참전한다. 그러나 두 다리에 부상을 입은 뒤 로욜라로 돌아와 ‘그리스도 일생’, ‘황금전설’ 등의 성인전을 읽고 깊이 느낀 바 몽세라로 순례를 떠나서 만테라 동굴에서 금욕적인 수련에 몰두한다. 거기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성수련’이라는, 감각과 신앙 그리고 행위를 결합시키는 독특한 수행법을 완성한다. 1540년 9월 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예수회는 엄격한 규율과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며 개신교의 대항마로 부각된다. 예수회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교세를 확장해나간다. 우선 뛰어난 학식으로 전유럽의 왕실에서 고해자로 활동하며 위에서 아래로 영향을 미쳤다면, 둘째로 교육기관을 세움으로써 젊은 인재들을 키우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태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해외 선교를 본다면 각종 대항해에도 참가하여 신대륙에도 예수회의 깃발을 꽂았다. 당시 원주민과의 만남을 묘사한 그림에서 십자가를 들고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예수회 선교사들이다. 예수회는 카톨릭 교회 체계확립과 더불어 교세확장이라는 트렌트 공회의 목표를 완벽히 수행하면서 말 그대로 카톨릭의 전위부대로 위세를 떨친다.  
종교개혁에서 카톨릭 개혁에 이르는 이론투쟁의 역사는 복잡하다. 그러나 성직자 계층의 부정하는 개신교와 그렇지 않다는 카톨릭의 충돌에서 대부분의 갈등이 파생되어져 나온다. 대사부 판매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은 성찬식, 성인 숭배 등 카톨릭 전통을 비판하면서 성상파괴라는 과격한 운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개신교가 보는 문화에서 듣는 문화로 전환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 트렌트 공회가 개최되고 카톨릭전통이 확고하게 재정립되면서 수성의 기반을 마련한다. 결국 예수회는 전투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유럽에서 잃었던 교세를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로까지 확대하면서 카톨릭 개혁의 선두를 자처한다. 이로써 16세기 종교개혁과 카톨릭 개혁의 이론투쟁이 일단락된다.
참고 :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 신준형(지음), 사회평론,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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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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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몇 권
2011. 2. 25
<남자다움에 관하여>, 하비 맨스필드(지음), 이광조(옮김), 이후, 2010년 7월
네오콘의 대부로 알려진 정치철학자 하비 맨스필드(Harvey. C MAnsfiled)는 이 책을 통해 근래 ‘성중립적인 사회(The Gender neutral Society)’에서 잊혀진 ‘남자다움’이라는 미덕을 되살리고자 한다. 페미니즘이 하나의 상식으로 굳어진 현재에 그의 이러한 야심 찬 기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좀 더 살펴볼 문제이다.
성중립적인 사회란 독립적인 남성과 여성들로 이뤄졌으며 “거대담론은 물론 일상에서도 “양성이 서로 수렴되어 차이에 대한 고정 관념을 포기한” 사회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성중립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사회 속의 남녀 간의 차이를 무의식 중에 드러낸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자면, 페미니즘이 비판하는데 몰두하는 ‘남성성’이라는 대상 자체가 이미 남성다움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현대 과학의 무수한 발견은 스테레오 타입으로서의 남성성을 확증하는 듯하다. 예컨대, 남성은 위험을 즐기고 여성은 안전을 추구하고,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부드럽고 등등. 그러나 의외로 맨스필드 교수는 과학의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단호히 뿌리치며 이를 헛소리라고 요약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대상을 분석할지언정 통합된 상(‘남성다움’)을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구제불능인 실증주의의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대상을 평가하지 못(안)한다. 하지만 그에 따르면 남성다움은 단순한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판단도 포함하는 좀 더 포괄적인 범주이다. 즉, 과학은 남자다움을 연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과학의 약점은’ 최고에 대한 무관심’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남성다움이란 과학이 산출해내는 평균값이 아닌 소수의 남자가 지닌 특별한 미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자다움-여성성과 대비되는 남성성이 아니다-이란 무엇인가? 그 유력한 단서는 책 말미에 그가 설명한 희랍어 두모스(thumos)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모스는 대체로 기개로 번역되며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공유한 격분하는 기질을 말한다. 이는 자연적인 본성을 따르는 동시에 이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성 속에 잠재돼 있는 두모스는 본성을 초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육체를 방어하기 위해 육체를 내던지는 순간 그는 육체에서 추상적인 어떤 것을 체현하게 된다. 즉 추상적인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를 위해 전투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 군인은 승리하여 살고자 하는 개인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무엇이다. 이것과 같이 남자다움은 개별적 존재를 보호하고 주장하면서도 더 나아가 개인의 이해관계나 충성심, 재산 등 모든 것을 그것 안에서 추출한 본질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친구를 잃고 자신의 여자를 빼앗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개인의 영역에서 흘러 넘쳐나 공동체의 대의에 복무하고 급기야 그 자신의 이름-곧 명예-을 드높이기에 이른다. 아마도 그는 남자 중의 남자일 것이다.
책을 읽고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논증한 ‘남자다움’은 맨스필드 교수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과 정의다. 사실 ‘남자다움’이 그 자신이 만든 사전적 정의가 아닌 역사적인 변화를 거친 개념으로 주장되지 않는 한 그것을 비판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이는 논점 선취의 오류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가지 더.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회의에 동의한다면. 과연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던 여성성(혹은 특징)을 부정하고 남성성을 모방하거나 성 구분의 ‘없음’을 주장한다고 여성이 진정 해방되는 것일까. 이를 여성의 남성성으로의 투항이나 가치로부터의 도피로 읽어내는 것은 무리일까.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시오도어 래브(지음), 강유원 외(옮김), 르네상스, 2008년 12월
이 책은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특정한 역사적 시기가 언제 끝났는지를 확정하고 그것이 근대 초기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중점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중세 서구의 통일성에 균열을 낸 르네상스 시기의 몇 가지 핵심적인 특징을 전 사회적인 맥락에 걸쳐서 추적하고 재구성해내는 방법을 택한다.
19세기 중반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확정한 이래로 르네상스라는 시대개념은 유럽의 15세기와 16세기를 설명하는 표준적인 용어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역사적 사건을 하나 꼽자면 바로 화약의 발명이다. 실제로 화약의 발명은 대포의 개발로 이어지면서 몇 가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을 생산해낸다. 우선 귀족층을 몰락을 들 수 있다. 용맹한 전사로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던 귀족들도 대포의 화력 앞에 무기력해지면서 새로운 자기상을 정립할 필요에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교양과 학식을 지닌 ‘궁정인’으로 변신을 꾀하면서 시대의 조류에 적응한다.(1) 이로써 과거 일정지역 내의 자치권을 주장한 고집불통의 권력자에서 궁정에 들어가 왕 밑에 복속된 신하로 전락하게 된다. (2) 또한 화약의 등장은 세속국가의 확립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는데 이는 천문학적인 화약과 대포의 주조 비용을 고려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오로지 중앙집권적인 정부만이 조세독점권을 발판으로 대포를 주조하고 이를 다루는 전문적인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군주와 그가 대표하는 국가의 형성을 촉진시키는 촉매제의 역할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등 도시국가는 프랑스, 합스부르크 왕가 등 왕조국가의 득세로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포와 관련하여 한가지 더. 사실 30년 전쟁이야말로 유럽인의 의식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당시 대포의 압도적인 화력은 전 유럽을 그야말로 파괴의 심연으로 몰아갔다. 스티븐 툴민은 이를 두고 ‘독일의 전 국토가 납골당’으로 변했다고 표현한다. 이런 혼란한 상황은 유럽에서 종교적 열정이 쇠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종교라면 진절머리가 날 지경)가 되었으며 이러한 현실 하에 종교적 관용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부화한다.(3) 극단에 다다른 혼란이 되려 향후 평화의 기틀을 다졌다는 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서글픈 역설이다. 이렇듯 반전의식이 주된 정서로 뿌리내리면서 유럽의 안정을 위한 각국의 외교적 노력이 시작된다.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 더해 세속국가의 등장과 근대 초기의 안정을 위한 투쟁은 유럽에 ‘지정학적 사고방식’과 ‘연합외교’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식하기도 한다.
이러한 항목에 부차적으로 과학혁명 정도를 더해볼 수 있겠다. 갈릴레오는 확실히 고대 그리스의 사상을 존경하였지만 그러한 과거지향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자연에 대한 검토와 이해의 방식에 일어난 변화는 점진적이지만 생각보다 깊고 큰 충격파를 던졌다. 가장 먼저 ‘고대가 우월하다���는 르네상스적 관념이 서서히 해체되었다. 또한 잠시 종교가 부재한 공백을 틈타 번성하던 점성술, 예언, 연금술 등은 이성을 앞세운 과학의 논리 앞에 굴복한다.
세속적 중앙집권국가체제의 확립. 과학혁명. 종교적 열정의 쇠퇴 등등.
이쯤 되면 일부 눈치 빠른 독자는 과거 중세와 결별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젖힌 역사적 추동력이 본의 아니게 거꾸로 ‘근대’라는 또 다른 세계를 예비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어느새 “더 이상 르네상스라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은 것이다.
<주석>
(1) “귀족들은 상당히 폭발적으로 도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관심사들을 좇았다. 그리고 그 소유주들이 도시의 집에서 머물고 있던 시기에는 그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밀집해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교’시즌’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pp.89)
(2) 스페인 소설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당시 귀족들이 몰락한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3) “종교적 열정보다는 국가의 이익이 전쟁의 동기가 됨에 따라 30년전쟁에서 현저했던 무자비한 잔인성이 누그러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p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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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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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2012. 5. 23
인류의 물질생활은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역사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시장경제는 이와 같은 물질생활에 반응한 경제생활의 한 형태였으며, 자본주의는 독점과 불평등이라는 특징을 지닌 시장경제의 한 갈래로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통찰을 빌려 역사에도 무의식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인류의 일상생활 즉 물질생활일 것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를 지탱해주는 습관같은” 일상생활 속에 인류 역사의 절반 이상이 묻어간다고 말했다. 예컨대, 인류는 밀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일정한 휴경기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덕분에 가축을 사육할만한 여유가 생겼고 각종 도구 및 농기구들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역으로 이러한 일상에서의 기술의 발달은 곡물 수확량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잉여생산물을 발생시킴으로써 사회 내 계급 분화를 촉진시켰다. 한편,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그 자체로 일상을 구성함과 동시에 그들의 일상생활을 강하게 규정하였다. 좁은 국토가 높은 산으로 나뉘어진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찌감치 소규모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었고 바다를 이용한 해상무역이 실시되었다. 반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으로 비옥한 농토를 지니게 된 이집트는 전역사에 걸쳐 ‘안정적인’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영원과 불멸이라는 주제에 쉽게 매혹되었고 그만큼 (그것을) 자주 표현하였다. 그들의 의식이 반영된 이집트 예술은 철저하게 주변환경(일상)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초기 인류의 물질생활은 비교적 소박하였다. 경제적 교환에 있어서 물건의 사용가치가 중시되었고 그나마 가끔씩 이루어진 타인과의 거래 또한 물물교환이게 마련이었다. 화폐 및 시장이 등장하면서 단촐했던 거래관계는 복잡하고 차가운 돈 계산으로 대체되었다. 시장경제가 역사의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우선시되었고 각지에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정기시와 거래소가 등장하였으며, 읍과 도시의 성장이 그 궤를 같이 하였다. 실제로 베네치아의 두 광장인, 리알토 누오보와 리알토 베키오에는 정기시와 거래소가 자리잡았고 그 지척에는 반키에리(‘은행’의 어원)라 불리는 은행가가 들어섰다. 시장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고리 역할을 했다. 그 거래과정은 상당히 투명했으며 생산자와 수요자는 직접 서로가 마주치는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거래가 비교적 좁은 범위에서 이루어졌기에 부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던 탓이다. 모두들 적당한 이득으로 만족하였고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15세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시장경제로 구성되는 생활공간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모종의 경제가 세계 여러 시장을 연결하면서 하나의 경제계”가 탄생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의 주체인 ‘자본’은 끊임없는 축적과 성장을 도모하는 자산에 다름 아니다. 자본은 기존의 시장규칙을 교란하는 것을 넘어 아예 바꾸어버렸다. 무엇보다 원거리 무역의 증가는 상인들이 규제와 관습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생산자와 수요자 사이에서 폭리를 취할 수 있게 하는 물적조건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거래의 투명성은 사라지고 서서히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인격적 관계가 파괴되어갔다. 소수의 자본가들은 비싼 배를 띄워 해외시장을 개척하였고, 각종 무역정보를 독점한 덕에 아시아에서의 현지무역 등을 통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1998, 안드레 군더 프랑크). 이들은 제3세계의 자원과 구성원들도 착취하였는데 이는 중심부-중간부-주변부로 구성된 근대세계체제(1980, 이매뉴얼 월러스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변부에서 수탈한 잉여가 고스란히 중심부로 이전되는 식이었고, 주기적인 경기변동 등으로 인해 중심부의 핵심이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다시 뉴욕으로 교체될 뿐이었다. 이처럼 경제계는 그 내부에서 불평등한 분업구조를 보였으며 심지어 근대의 같은 시기, 생산양식 또한 주변부의 노예제(플랜테이션 농업) 및 농노제에서부터 중심부의 자본주의까지 다양한 형태로 공존하였다. 우리는 ‘농노제-봉건제-자본제’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도식보다는 오히려 역사가 보여주는 이러한 비동시성의 동시성(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지리적 불평등의 적극적 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 재생산을 위한 오래된 전략(1985, 데이비드 하비)이었음을 자본주의 역사 전체가 방증하는 셈이다.
일상의 시간은 ‘장기지��’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종속됨과 동시에 인류의 구체적인 행위와 역사까지 잠식해왔다. 그럼에도 인류의 창발적인 노동은 나름의 시공간을 창출해내면서 화폐와 시장을 매개로 한 시장경제를 탄생시켰다. 나아가 근대 이후 지리적 확장 등을 계기로 세계를 하나의 경제계로 묶으며 자본주의라는 보편적인 체제를 완성시키기에 이르른다. 그러나 결국 주변부 국가들의 집합적 희생을 대가로 치른 현재의 분열된 세계로 귀결되어버린 것이다. 씁쓸하다.
참고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페르낭 브로델(지음), 김홍식(옮김), 갈라파고스,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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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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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고전 정치철학의 망령
2010. 5. 23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사실이 아닌 가치를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덕(virtue)의 실현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덕은 인류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가치이자 최고형태의 사회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무엇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숭고한’ 정치철학은 ‘잔인한’ 전쟁으로 귀결 되면서 피비린내 나는 권력 창출의 구심점으로 변질되고야 만다.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정치철학을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한 의견을 정치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의견(doxa)은 지식(episteme)과 달리 우연적이고 파편적이며 불완전한 인식의 결과물로서 존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의 제자인 예일대 교수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1)은 한 대학 강연에서 말한다.
“I think Mark Twain’s Huck Finn is really very, very revealing to see what is so different about us in the modern times from the Homeric world. (···) He lights out and wants to get away from society, he wants to go wandering and exploring, as an individual rejecting society, fleeing for his individualism, (···) The Greeks would have thought you were out of your mind, or that you were some kind of barbarian” (The Lecture of Introduction to Ancient Greek History with Professor Donald Kagan)
그는 호머(Homer)의 세계관을 예로 들며 미국의 공동체 정신의 부재를 한탄한다. 그에 따르면 허클베리 핀으로 형상화된 미국식 개인·자유주의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면서 참된 공동체 정신을 훼손한다. 그는 개인·자유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을 중시하며 모든 이의 ‘의견’에 비슷한 진리치를 부여하는 다원주의로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를 진정한 선의 실현이 아니라 단지 개별자의 상충되는 이���을 조정하는 역할로 한정시키고 마는 어리석은 짓이다. 이처럼 지식(episteme)이 아닌 의견(doxa)을 인정하는 자유·개인주의는 덕의 실현을 통한 인간적 우월성의 발현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신 나간 짓(out of your mind)”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따라서 진정한 지식을 추구하는 정치철학만이 불안과 혼란을 수습하고 참된 덕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레오 스트라우스의 《자연법과 역사》의 한 구절을 보자.
“인간은 자연의 최고의 위상에 도달하기 위해 최고형태의 사회, 즉 인간적 우월성을 발현시키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형태에서 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 밖에 ‘신’ 혹은 ‘짐승’만이 존재할 수 있다면서 인간을 폴리스적인 동물(a politicon zoon)로 규정한다. 결과적으로는 ‘정의로운’ 폴리스야말로 ‘정의로운’ 개인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때 고전 정치철학자(2)들은 폴리스와 같은 정체(政體)를 ‘Politeia’라 불렀으며 스트라우시언들은 이를 ‘Regime(정체)’으로 번역한다. 즉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위해서는 최선의 레짐이 있어야 하며 이로써 공동체는 개인의 우위에 놓이게 된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그야말로 최고의 정체(best regime)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그들이 말하는 최고의 정체는 바로 귀족정(Aristocracy)(3)이다.
“What the kind of regime that emerges along side the polis, is an aristocratic republic in which the noblemen have influence and power within the community by tradition and they are plural. There is not one real king. There is typically a council of aristocrats; that’s what we connect with the polis, and of course, it was natural.” (위와 동일)
도널드 케이건은 소수의 고귀한 자(noble man)들이 통치하는 귀족정이 인류의 전통이며,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자연적인 위계질서라 주장한다. 탁월한 정치적 지식과 기술을 지닌, 즉 정치가의 arete를 소유한 자가 정체를 운용할 때야 비로소 “최고형태의 사회”가 구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무지몽매한 다수의 군중은 말 그대로 ‘우중(愚衆)’이며 탁월함을 지닌 고귀한 자들이 이들을 선도해 이끌어 나가는 것, 그것이 곧 덕의 실현이요, 정의인 셈이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의 현실·정치적 함의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체사레 보르자 등의 권력자를 ‘보통 사람들과 차별되는 인간’으로 숭앙하는 영웅사관에는 분명 근대의 정치의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엘리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미 국무부 장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는 북한에 대해서 ‘레짐 트랜스포메이션Regime transformation’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사실 레오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을 그 맥락으로 지닌 일종의 정치적 수사이며 단순한 정치 지도자의 교체가 아닌 국가 시스템 자체의 전복을 의미한다. 레짐은 전술한 바와 같이 물론 정체 (Politeia)의 번역어이기도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범주로서 ‘폴리스의 형상(The form of city)’을 뜻한다. 그렇다면 ‘Regime transformation’은 한 정체에서 다른 정체로 본질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폴리스(city)의 본질을 완전히 변형(transform)시킴으로써 정부의 구성뿐만 아니라 그 안의 시민들의 문화·도덕 등 의식적인 측면에 이르기까지 삶의 영역 전체를 바꾸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들 스트라우시언들은 북한과 이라크 등을 타락한 참주정(tyranny)으로 규탄하면서 이토록 나쁜 레짐을 좋은 레짐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짐이 타락하면 그 속에 사는 시민들의 삶 또한 타락할 수 밖에 없는 법. 이러한 선악의 이분법은 우월한 레짐과 열등한 레짐으로 서열화하면서 자연스레 ‘자비로운 패권주의(benevolent hegemonism)’를 정당화한다. 또한 이러한 사고체계는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한 발언을 통해 구체적인 현실성을 획득한다. 결론적으로 이라크 전쟁 또한 나쁜 레짐에 사는 시민들을 해방시켜 ‘좋은’ 레짐을 구현하는 자비로운 해방전쟁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그린존(Green Zone)>을 보라. 영화는 미국이 이라크 인민들의 의지에 반해 자신들의 과도기 정권을 수립하려는 배경과 대량 살상 무기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이러한 정치적 이념의 현실태를 여과 없이 그려낸다.
정치학은 가치(Value)를 배격하고 사실(Fact)에 몰두하며 근대 자연과학을 모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치공학(Poitical Engineering)으로 전락하곤 한다. 요컨대 정치철학은 단순한 사실의 취합과 현상세계의 분석을 뛰어넘어서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가치판단의 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레오 스트라우스는 덕의 실현에 주목한다. 그러나 ‘덕’의 본질은 무엇일까.
“The Greek view, moreover, presupposes that man lives in society. He is not a creature off by himself. By definition, he necessarily lives in society. (···) the reward of good behavior is the admiration and the honor that a hero gets, and the most serious punishment he can suffer is to be shamed in front of that community.“ (위와 동일)
폴리스 구성원에게 있어 가장 선한 행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보다 한갓 이름을 선택한 저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보라. 이름은 바로 존경과 명예를 상징하면서 진정한 덕의 실현이자 위대한 영웅의 기본 조건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플라톤 또한 대화편에서 ‘용기’와 ‘사려’를 지닌 신적인 존재로의 정치가를 논증하며 난색을 표한 바 있듯이 이러한 덕은 소수만이 지닐 수 있는 영역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귀족정 옹호는 당연한 논리적 수순이며, 다수의 지배를 거부하고 소수의 정치가들이 지배하는 완전무결한 사회가 바로 이상국가일 것이다. 허나 정작 비루한 현실정치는 환멸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며 더 이상 진리의 빛은 정치의 끝자락조차 밝히지 못한다. 결론은 진리들의 대중화와 저속화에 맞선 새로운 레짐의 완성이다. 이로써 철지난 고대사회의 덕을 바탕으로 강자의 논리를 정의로 규정하는 기괴한 정치철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각주>
(1) 도널드 케이건은 예일 대학 교수이자 전쟁 역사학자이다. 1960년대 코넬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료 교수인 앨런 블룸으로부터 스트라우스를 배웠다. 네오콘 외교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The Peloponnesian War』이다.
(2) 레오 스트라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일명 ‘보스턴 교양주의’를 내세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한 개인들이 대단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간주한 근대사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서구문명의 타락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철학자-소크라테스, 플라톤, 크세노폰 등-들을 내세어 Politeia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When we think of monarchs, single rulers, we think of Hammurabi and we think of the kings of Persia, and we think of Louis XIV. We do not think of what we have here, which is a bunch of noblemen who are essentially equal, and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don’t come from birth or rank as between them, but from wealth and power that they happen to possess. It is, rather, not a royal society but an aristocratic society.”
도널드 케이건은 일리아드, 오딧세이아 등 일련의 고대 그리스 저작을 살펴보면서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정치형태가 ‘왕정’이 아닌 ‘귀족정’이었음을 증명해낸다. 이것이 서양정치의 전통이라 주장하면서 오히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전통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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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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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전략, 계급투쟁을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
2009. 11. 29
1900년대 초, 안토니오 그람시는 러시아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진보를 경험했지만 조국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발흥 또한 목도한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두 사건의 접점으로 그는 ‘헤게모니 문제’를 발견한다.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계급은 물리력을 이용한 강제뿐만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 동의를 구하는 다양한 층위의 헤게모니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1월 22일 이탈리아 큰섬 사르디니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르디니아는 가난한 남부 도시로서 이 당시 경험은 장차 그람시가 소위 ‘남부문제’에 천착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토리노 대학에서 사회당언론인 <전진>에 기고하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다. 러시아혁명의 상황과 성격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던 1917년 12월에 그람시는 <전진>에 「’자본’에 반한 혁명」을 기고한다.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발전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하였으나 후진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마르크스의「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람시는 이것이 오히려 역사유물론이라는 철의 법칙을 뛰어넘는 인민의 의지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참된 혁명이며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를 드러냈다고 역설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이탈리아는 전승국으로의 이권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민중들의 불안과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1919년 11월에 열린 전후 첫 선거에서 사회당은 많은 수의 의석을 확보한다. 이에 그람시는 소비에트 즉 평의회를 미래 사회주의 국가의 맹아로 보고, 평의회운동을 주도한다. 노동자계급은 “지금 당장 국가의 자산을 통제하고 운영하는 본질적인 영역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인계할 준비가”되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공장평의회는 작업장의 모든 단위로부터 대표자를 선출하고 근로조건의 개선에서 공장의 운영까지 모든 의제를 토의에 부쳤다. 이러한 공장점거는 토리노를 넘어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까지 확산되면서 지배계급은 불안해졌다 이것이 붉은 2년(Biennie rosso)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남부 출신의 우파수상 지올리티는 노동총동맹의 지도부를 회유하고 타협하면서 대중투쟁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1921년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하였지만 밀라노의 공장점거라는 마지막 희망은 무산된다. 이처럼 좌파와 우파 그 누구도 확고한 주도권을 잡지 못한 상황 속에서 1922년 10월 무솔리니가 파쇼단(Fasci)을 이끌고  ‘로마행진’에 성공하면서 파시즘이 들어선다. 말하자면 ‘붉은 2년’의 패배와 타협의 후과가 파시즘을 매개로 한 자본가 계급의 총반격으로 나타난 것이었고, 그러한 파시즘의 손발이 된 것은 농민을 비롯한 중간계급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은 1977년 <신좌파평론>에서 헤게모니의 기원을 심도있게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어로 ‘heremonya’라는 용어는 1890년대에서 1917년에 이르는 러시아 혁명 운동에서 중요한 슬로건 중 하나였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자본에 대항하는 경제투쟁뿐만 아니라 차르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을 역설하였고, 악셀로드 또한  반절대주의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역할을 요구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주도성’을 정초한다. 이때, 헤게모니는 ‘주도성의 탈환’이라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람시는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이중적 관점’, 즉 ‘강제와 동의’ 또는 ‘지배와 헤게모니’의 관점을 요청했고, 여기서부터 헤게모니를 서구 부르주아 권력에 대한 차별화된 분석으로 이용된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물리적인 강제와 더불어 시민사회에서 성취되는 대중의 ‘동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정계급은 지배와 강제를 통해서 사회 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이로는 불완전하다. 교육, 미디어, 문화, 법적 기구 등의 상부구조를 통해 지배계급의 이해를 보편의 이해로 포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고보면 러시아혁명은 차르체제에 반하는 노동자의 의식을 집결시키고 이를 시대의 주도적인 대세로 이끌어내면서 성공적으로 체제를 전복한 셈이다. 즉, 노동자 계급이 러시아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이것이 혁명의 승리로 이어진 것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또한 자본가 계급이 1920년대의 역전된 정세를 뒤집고 다시 한번 헤게모니를 쥐고자 중간계급을 동원하여 이루어낸 반동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헤게모니에 관하여 마르크스가 “모든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 것 이상의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게모니 투쟁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동전’으로 여기서는 모든 투쟁이 단일한 전선으로 수렴하고 집중된다. 즉 정면전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구가하는 전술로, ‘적의 방어’에 단 하나의 틈새가 있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투쟁유형이다. 두 번째로 ‘진지전’이 있다. 이는 상이한 그리고 다양한 투쟁전선을 가로질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진지전에서 중요한 것은 적의 ‘전진참호들’이 아니라 ‘전장의 군대 후방’, 즉 시민사회의 구조와 제도들을 포함하는 사회의 전체구조이다. 그람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적인 최후의 기동전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적 민주주의적인 형식과 복잡한 시민사회를 지니고 있고 정치적인 민주주의를 통해 광범위한 대중의 동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는 서구 유럽의 상황을 들어 더 이상의 기동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지전의 수행은 노동계급의 궁극적인 승리에 필수불가결한 전략이 된다. 
이제 헤게모니와 진지전의 문제는 이데올로기라는 전장으로 집약된다. 그람시는 이데올로기의 두 가지 층위를 구분했다. 우선 상식(common sense)의 영역을 들 수 있다. 상식은 논리적 일관성이 부재하고 파편적이며 모순적이다. 그러나 인민 대중의 실천적 의식이 실제로 형성되는, 이른바 개념과 범주들의 지형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고 대중의 실천을 고양시키려면 상식은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요소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정치의 영역은 상식과는 달리 지적 조직화를 추구하며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 사회적 관계,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관계의 총체를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주요 매개자들은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순환과 발전에 대해 전문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유기적 지식인이다. 이데올로기 투쟁을 동반한 헤게모니 전략은 대중의 상식을 파고들면서 유기적인 지식인이 마련한 특정한 세계관을 주입시킨다. 이는 정치에 의해 보장되며 혁명의 과정에서 “물질적 힘 그 자체”로 작용하게 된다.
그람시가 평희회운동을 지지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중과의 접촉과 혁명 시 노동자계급의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혁명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하나의 정치적 프로젝트이자 장구한 ‘역사적인 블록(historic bloc)’의 형성과정이었다. 그렇게 볼 때 혁명의 이행뿐만아니라 이행의 성격 또한 중요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대중의 상식을 장악하고 이를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하는 헤게모니 전략의 필요성이 도출되면서 진지전-기동전 전략과 유기적 지식인의 존재가 정당화된다. 결국 부르주아 사회의 어떤 영역도 계급투쟁의 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처럼 ‘관계의 총체’를 인식하는 한 혁명은 총체적인 것들을 변혁하고자 하는 투쟁으로 귀결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 
<안토니오 그람시-옥중수고와 혁명의 순교자>, 김현우(지음), 살림출판사,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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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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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윤리는 가능한가?
2009. 11. 29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을 검토하면서 자유라는 관점에서 윤리를 바라본다. 비록 모든 행위는 자연적, 사회적 인과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를 상정하지 않고는 선악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실천적인 영역에서 요청되는 이러한 자유는 개인의 윤리의식뿐만 아니라 전사회의 변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준다.
흔히 윤리는 단순한 선악의 문제로만 파악된다. 이 때 윤리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우선 선악을 판단하는 근거로 공동체의 규범을 드는 것이 한 예이다. 다른 예로는 선(쾌락)은 쾌락의 실현으로 보는 영미 윤리학이 있다. 이는 공리주의 윤리학이라고도 알려졌으며 오로지 쾌락만을 윤리의 잣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는 기존의 윤리학을 거부하면서 보편적인 윤리문제는 자유와 결부되어있다고 주장했다. 공동체의 규범과 공리주의는 모두 타율적인 윤리관으로서 그런 면에서 전혀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규범에 근거한 행위는 외부로부터 강제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타율적이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행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자신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맘껏 누리며 행위하도록 하는 공리주의 역시 개인의 자발성, 자율성이 행위의 근거라고 보기 힘들다. 예컨대 어떤 물건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은 사실 남들이 가지고 있기에 발생하는 욕망이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으로서 쾌락은 외부로부터 투사된 타율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다. 설령 순수하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발생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신체적인 욕구에 따라 규정된 행위이기에 자유라 볼 수 없다. 여기서 칸트는 자유를 통상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함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자유는 자기원인적인 것, 자율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동의어다. 물론 모든 행위는 자연적, 사회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지만 그는 “자유로워지라”는 지상의 명령을 통해 자유의 존재를 입증하면서 “당위기 때문에 (자유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든 사건은 외부로부터 기인한다. 인간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자연필연적인) 질서에 따라 사건의 무한계열을 오로지 좇아갈 뿐, 나 자신이 어떤 시점에서 스스로 사건을 시작한다고 할 수 없고”요컨대 “모든 사건의 이런 무제한적인 계열은 자연에서의 끝없는 연쇄며, 따라서 나의 원인성 역시 결코 자유가 아닌”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살인자가 있다. 그가 살인하게 된 계기는 자유의지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이 자유의지라 할지라도 의지만으로 살인은 불가능하다. 여타 주변 환경, 사회구조 등으로 살인의 동기를 규정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로운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다양한 교육과 선전 등에 의해 주입된 사상과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결국 여러 원인을 구체적으로 따져가면 범인에게 ‘자유’따위는 없고, 따라서 책임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살인은 오로지 자기원인적인 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살인자에게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인가? 자유로운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에 칸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칸트는 범인에게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행위하는 시점에서 자유가 없었다는 점은 분명할지라도 그가 스스로 자유에 의해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된다는 말이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에 의해서만 존립하며 그것은 결정론적 인과성 따위는 배제하는 윤리적인 요청인 것이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으로 대하라”, 라는 것을 보편적인 도덕법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현재 자본제 경제에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로 인한 임노동(노동력 상품화)의 존재로 인해 타자는 단지 수단으로 취급될 뿐 목적(자유로운 주체)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산골 초가집에서 농사를 짓고 살지 않는 이상 타자를 수단으로 대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진은 여기서 ‘만이 아니라’는 문구에 주목하면서 이를 근거로 칸트가 구조주의의 발상을 선취했다고까지 주장한다. 개인이 스스로 벗어나있다고 여길지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작용하는 관계망의 존재를 직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실구조의 파악을 근거로 자본제 경제를 지양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것이지 역사적 법칙의 필연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현실의 인과성에 구애받지않는 실천의 영역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의 실현은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의 현실적인 형태이자 전사회적인 자유의 실현인 것이다.
윤리는 자유인가 아닌가로 정의된다. 기존의 윤리학은 타율적인 행위를 자유라고 속이며 도덕적인 행위로 규정했다. 그러나 칸트는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한 채 실천적(도덕적)영역에서 윤리를 요청함으로써 ‘자유’와 ‘자유로운 주체’의 근거를 마련하고 명령(‘자유로워져라’)에 기초한 새로운 윤리학을 정초한다. 한편 칸트의 윤리학은 타자를 수단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주체이자 목적으로 대하는 것까지 포함하면서 자본제 경제와 마찰을 일으킨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차원에서만, 타자를 잉여가치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자본제 임노동의 폐기와 이를 위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점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 :
<윤리21>, 가라타니 고진(지음), 송태욱(옮김), 사회평론,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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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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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2009. 11. 29
홉스의 철학은 ‘물체론-인간론-국가론’으로 전개된다. 홉스 형이상학의 제 1원리인 운동을 통해 기계적 인과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설명하려는 물체론, 운동과 그 원인이 되는 노력(endeavour)으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인간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들을 통제하는 ‘인공적 인간(artificial person)인 국가의 탄생을 말하는 국가론을 끝으로 하나의 철학체계가 완성된다.
홉스에 의하면 운동은 “한 장소의 상실과 다른 장소의 취득”(De corpore, Ch6)이며, 그에 반하여 정지란 “어떤 한 장소에 일정한 시간동안 있는 것을”(De corpore, Ch8)말한다. 모든 것은 정지하거나 운동하며, 정지 또한 운동을 전제하는 바 모든 것은 운동하는 물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은 기계적 인과성만이 존재하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으로만 이해된다. 이러한 이론적인 작업 하에 그의 철학 전반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초(arche)인 ‘노력(endeavour)’이 고안된다.
노력이란 “걷고, 말하고, 때리는 등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사람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운동의 작은 시작”(Leviathan, p119)이며 이러한 노력이 사물에 접근하면 ‘욕망(desire)’, 멀어지면 ‘혐오(aversion)’이라 부른다. 더 나아가 홉스의 말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욕구하거나 욕망하는 대상은 무엇이거나 그에게는 ‘선’이며, 그가 미워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은 무엇이거나 ‘악'”(Leviathan, p.121~128)이라 불리게 되며, 모든 인간은 “어떤 일이 가능하다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된 욕망과 혐오, 희망과 공포의 감정을 전부 합하””(Leviathan, p1121~128)는 숙고(deliberation)를 거쳐 행동하게 된다. 이로써 욕망이 도덕의 잣대가 되고, 무한한 욕망을 계산하여 추구하는 개인들이 탄생하는 데 그 이름은 ‘근대인’이다.
홉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층 논리를 밀어부쳐서 그 특유의 국가론을 정립한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므로””(Leviathan, p.183)동일한 자기 보존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욕망은 “어떤 이에게 분명히 ‘선’이 될 것으로 보이는 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현재 가지고 있는 수단””(Leviathan, p.150)인 ‘힘’을 통해 충족시킬 수 있다. ‘이런 능력의 평등으로부터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희망의 평등’이 생기고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 간의 충돌을 야기한다. 즉, 자연상태가 등장한 것이다. 절대적인 윤리 기준이 실종된 채 오로지 개인의 욕망이 새로운 행동의 규준이 됨에 따라 “그들 모두를 두렵게 하는 공권력이 없는 시기””(Leviathan, p.185)가 도래한다. 이는 그 유명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온다. 홉스는 지금까지의 논리 전개를 바탕으로 리바이어던(Leviathan)을 탄생시킨다. 더이상 국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바라보듯 덕(virtue)의 실현 주체이자 개인의 발전계기가 아니다. 무한한 개인들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면서 그 어떠한 윤리적인 ‘선’을 담지하지 못한 ‘괴물’이 되버린 것이다.
홉스는 자신의 철학체계의 원리를 운동으로 파악하며, 물체론을 정립해나간다. 당시 유행하던 물질주의적 원자관을 반영한 것으로, 모든 사물은 운동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또한 인간 본질 탐구에 있어서도 운동이 중심개념으로 사용된다.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노력’이 인간행동의 원인이고, 이는 인간 행위나 심리가 ‘기하학적 추론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의 국가론 또한 기계론적인 사고 방식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인공적 인간’으로의 리바이어던은 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책 읽는 내내 흥미로웠던 점은 당시 ‘주관성의 원리’에 따라 행위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탄생을 목도하였지만, 이러한 개인의 자유는 ‘국가’라는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자유를 위한 자유의 부정. 이는 고대 그리스 비극과 같이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 되는 역설을 낳아놓는다. 결국 우리의 ‘근대’는 여기까지아며, 여기서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참고 : 
<리바이어던>, 김용환(지음), 살림, 2005
<근대실천철학연구>, 강유원(지음),  allestel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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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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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 지향의 새로운 역사학
2009. 12. 29
역사인류학은 1970년대부터 이루어진 문화적, 지적 변동과정에서 탄생하였으며 기존의 사회사의 구조사적 시각을 벗어나 인간존재의 주체성과 다면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인접 분과학문과의 공동연구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인류학의 미시사적인 측면은 포괄적인 설명과 대비되어 객관적인 당면 현실의 이해에 있어서 난점을 보이기도 한다.  
역사인류학적 구상은 1970년대 모든 중요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와 근대자체에 대한 회의 속에서 이루어졌다. 기존의 사회사는 막스베버와 칼 맑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모던(Modern)을 우선적인 관심대상으로 선정하고 무제한적인 근대화를 추종하였다. 이러한 “근대적 전체사회사”는 모든 역사적 과정을 현재의 전사(前史)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했으며, 결과적으로 사회변동 및 구조의 주관적인 의미와 구체적인 생활세계를 포착하지 못하였다. 이에 역사인류학은 인류학적, 일상사적 탐구를 포함한 새로운 사회사적 역사서술을 제시하게 된다. 즉 “주어진 구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인간의 행위공간”을 연구하는 ‘개별적’사회사로 나아가게 된다.
역사인류학은 “행동하고, 생각하며, 느끼고, 고통 받는 구체적인 인간을 역사분석의 중심”에 세우면서 역사 속 인간존재의 일반성보다 인간행위의 독특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인접한 분과학문과의 연계를 통해 역사학의 새로운 주제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일상사는 인류학과의 접목을 통해 보통사람들의 일상생활의 관심사를 주체지향적인 생활세계로 분석한다. ‘하층민’과 억압받는 계층의 문화적 행위를 다루는 ‘역사적 민속문화 연구’또한 이와 유사한 예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개별주체의 행위에 대한 강조는 새로운 ‘문화’개념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기어츠에 따르면 문화는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전달되는 상상들의 체계”로서 기존의 시민적 문화-음악, 미술, 문학 등의 높은 경지-는 엘리트 집단의 세계관의 표현이자 문화의 상부구조로의 환원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시민’세계의 가치뿐만 아니라 개별집단의 전통과 생활세계의 이해관계를 포함하는 새로운 문화 개념을 제시한다. 즉 단일한 문화가 아닌 다수의 문화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인류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반경의 다층성”을 조명한다. 또한 “규율화론과 근대화론에서 말하는 근세시기의 가부장적 지배형태”의 보편성에 의문을 표하면서 역사학에 만연한 성급한 일반화를 경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역사인류학의 강점이자 약점으로 작용한다. 역사인류학은 사회적인 콘텍스트를 이해하고 당사자의 주관적 입장을 고찰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역사 속 인간행위의 역동성을 간과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총체적 행위의 구성물인 구조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진다. ‘객관적인 구조’는 인간의 지지없이 성립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이 사회변화를 어떤 식으로 공동구성해나가는가’하는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거대한 관계와 발전은 미시적인 층위에서만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우연한 역사 자료를 계기로 시작되는 “‘진정한’ 생활 세계를 밝히고자 하는 연구”는 언제나 실패하게 마련이다. 그들이 “재구성하여 되살린 세계는 여전히 구성물”이며 “실제의 근사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인류학은 미시사적인 연구의 한계와 역사사료의 대표성 문제에 직면한다. 결과적으로 “생활세계의 콘텍스트화”라는 절차를 거친 ‘두터운’ 묘사를 통해서만 ‘위대한’ 행위와 구조까지도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인류학은 제도사와 구조사가 발견하지 못한 개별인간들을 다시 발견하였고 이는 분과학문 간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담론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인류학적인 문제 설정으로 여성사와 남녀사, 일상사와 경험사를 비롯한 새로운 형태의 역사를 제시하였다. 이로써 “가치와 관점이 상대화되면서 인간에 관한 역사서술이 성취”되었고 역사를 구조의 과정이 아닌 “열린 과정”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주체에 의한 객관적인 구조의 습득 과정에 주목하면서 결과적으로 개인들이 생산해낸 구조를 도외시하였다. 따라서 역사인류학은 개별연구 속에서 드러나는 전체를 주시하여 ‘새로운’ 일반론을 세우는데 초석을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 : 
<역사인류학이란 무엇인가>, 리햐르트 반 뒬멘(지음), 최용찬(옮김), 푸른역사,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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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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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을 향한 역사학의 도전
2009. 12. 28
역사는 ‘묘사’를 서술방식으로 삼는다. 이에 역사학은 시공간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특정한 일반화를 시도한다. 여기서 역사학은 변수의 상호종속성을 전제하면서, 독립변수를 추구하는 사회과학과 자신을 구분한다.
역사가는 곧 지나가버릴 현재를 비롯하여 과거를 탐구한다. 즉 과거를 탐구대상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접근할 수 없는 과거를 대상으로 오로지 ‘묘사’만이 가능할 뿐이다. 묘사는 탐구대상과 그에 따른 방법론적 한계로 인해 우리에게 간접적이면서도 불확실한 정보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관찰자는 묘사를 통해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면서, “실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한다. 즉 우리는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넓어진 시야는 우리에게 “성장과정과 상응하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거대한 과거의 풍경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하찮음을 경험함과 동시에 대상세계와 자아 사이의 객관적 관계를 인식한다.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의식이란 “시간을 통해 그 성숙을 투사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과거세계로부터 현재에 필요한 경험을 ‘추출’해 낼 수도 있다. 현재에 무조건 적합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과거를 올바로 해석하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의 대리확장”인 것이다. 경험을 확대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현명하게 미래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는 “선별성과 동시에 동시성을 가지며, 스케일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무한한 과거세계로부터 특정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 때 상이한 시공간 속에 놓인 사건들의 동시성을 가정하여 비교작업을 수행한다. 이로부터 새로운 역사적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작은 것의 묘사-미시적 작용-를 통해 거시적인 해석을 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전염병의 세계사가 그것이다. 물론 역사가의 증거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관점은 제한되어있으며, 증거 자체는 무한대의 사실과 올바른 진술들이 나올 수 있는 개개의 특정 사건들이 포함된 방대하게 팽창하는 우주”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이 정확하며 불변하는 진리(혹은 구조)를 전제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역사와 마찬가지로 역사성을 도입하여(양자역학을 보라) 과정에서 구조를 추론해낸다. 요컨대 일부 과학-지질학, 진화생물학 등-은 특성상 재실험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들 과학은 사고실험을 실시한다. 이것은 유물 등의 역사적 증거를 통해 상상하는 역사가의 탐구방식과도 일치한다. 이를 통해 이론과 실제 사이에 ‘적절한 정도의 맞아떨어짐’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과거를 보편적으로 일반화할 수도, 미래를 예측하지도 못하는 역사학은 과연 과학적일 수 있을까? 이는 사회과학자들이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제기하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구분’과 관련된 문제와 연결된다. 사회과학은 “반복실험과 매개변수의 다양화”를 통해 “인과관계를 위계지울 수 있는 실험실 과학”을 표방한다. 저자는 이를 ‘환원주의적(reductionist) 관점’이라 표현한다. 즉 인과관계의 사슬에서 가장 결정적인 변수(독립변수)를 찾아내는 것이다. 보편적이면서 일반화된 특정화를 추구한다. 이는 미래예측을 목표로 하는 사회과학의 내적 특수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과학이 전부 이런 식은 아니다. 또한 한 두가지의 기본‘원인’은, 원인의 다양성이나 시간의 흐름, 또는 문화적·개인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실질적으로 인식불가능하다. 이와 달리 역사학은 제한적인, 즉 보편적이지 않은 일반화를 추구한다. 역사가는 우연적인 인과관계를 믿으면서 결과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통해 과정을 추적해나간다. 이는 구조에서 과정을 추론하는 전통적인 과학의 방법론과는 구분된다. 이것을 ‘생태주의적(ecologicl) 관점’이라 부를 수 있다. 역사학은 사회과학이 빠져있는 ‘물리학에의 동경(physical envy)’을 벗어나 오히려 최신과학의 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예컨대 복잡계 과학은 복잡인과관계를 전제로 상호종속변수를 가정한다. 즉 결정적인 독립변수의 존재에 회의적이다. 더 나아가 ‘초기조건에 대한 민감성’, ‘프랙탈’, ‘자기조직화’의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순수’과학과는 대비되는 사건의 ‘비(非)-선형성’을 인정한다. 이 지점에서 사회과학과 최신과학 사이의 이론적 연결고리로서 역사학의 위상이 도출된다.
“역사의식은 성숙함 그 자체처럼 자신의 중요함과 하찮음을 동시에 남겨준다.” 이는 자기의심과 확신을 동반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며 또한 역사의 해석을 통해 현재 상황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척도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역사학은 접근불가능한 과거의 탐구라는 본질적인 한계로 인해 구조에서 과정을 이끌어 내거나 현실에 묘사를 끼워 맞춘다. 즉 하나의 영역에서 나온 직관을 다른 영역에 적용-합치(consilience)-하는 데 개방적이다. 이에 사회과학은 간결성, 명확성 등을 내세우며 역사학의 비과학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학의 사유방식은 현실세계의 비결정성을 강조하는 최근의 과학의 사유와 닮아 있으며, 여기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잇는 역사학의 학문적 기반이 마련된다.
참고 :
<역사의 풍경>, 존 루이스 개디즈(지음), 강규형(옮김), 에코리브르,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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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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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면전에서 차마 답하지 못했던 질문들
2014. 4. 27
현실은 책의 내용과 다르지 않은가? 현실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제 슬슬 문제 파악이 되나.
학자란 상아탑에 갇혀있는 먹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간 학자들이 제공한 지식과 기술 덕에 밥 벌어 먹고 산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독서는 한가한 사람들만이 누리는 사치 아닌가? 의지만 있으면 부릴 수 있는 사치가 독서다. 이론과 실천은 별개의 것이 아닌가? 이론이 곧 실천이다. 당신의 생각보다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사람들의 인생에도 급이 있나? 진심으로 당신의 인생이 연쇄살인범의 인생과 동급이라 여기는가? 너무 극단적인 비유다. 그럼 일반 대중들의 삶에도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 게 불가능하다면 당신이 이 질문에 이리도 집착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누구의 인생은 덜 특별하다는 말인가? 우리들 인생은 모두 특별하기 때문에 모두 평범하다.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지닌 재능을 충만하게 발전시키고 사용하여 즐거울 수 있는 삶.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세상과 평온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 문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내가 알면 금, 모르면 똥.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가? 평소에 유니클로와 프라다도 구분 못하나.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를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엘리트주의 아닌가? 오히려 양자를 구분하지 않는 게 인류를 향한 모독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나. 누가 고급스러운 문화를 즐길 수 있나? 반드시 즐겨야만 하는 일부 부유층 인사들 혹은 없이 살아도 즐기고자 ‘노력’하는 일반 사람들. 굳이 고급스러운 삶에 집착할 이유가 있나? 없다. 맥 프로 사서 크롬 북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울 뿐.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는 우리들처럼 살고 있기에는 더 없이 아까운 존재들이라는 말. 당신을 침울하게 만드는 것은? 섬세하게 정제되지 않은 상대주의. 인간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조건은? 주변에 좋은 친구들과 뛰어난 스승을 만나 교류하는 것. 지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조건은? 미친 듯 독서에 몰두할 수 있는 청춘의 특정 시기.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남이 한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버튼 눌리지 않는 것. 쪽팔림은 순간이나 레벨업은 영원하다. - 인간적인 매력을 정의한다면? 세상에 대한 확고한 애티튜드. 가장 매력 없는 사람은? 앞의 답을 볼 것. 청춘의 느낌은? 길 가다 주운 오만원권 지폐. 낭비해야 제 맛이지만 낭비했다간 망해버리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볼품없는 환상을 온전히 투영해낼 상대를 찾아 기어이 소유하려는 집요하고도 기괴한 욕망. 그게 무슨 말인가? 대체로 실패한다는 말. 사랑의 종착점은 결혼인가? 연애의 종착점이 결혼이겠지. 바람직한 연애의 결말이란 무엇인가? 각자의 전장에서 각자의 전투를 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 이제 더 이상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전우가 아니니까. 가장 크게 실망한 순간은? 삶이 말 그대로 ‘무’의미하며 인간은 대체로 어리석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요즘 당신의 인생에서 즐거운 순간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순간. 최근에 감명 깊게 본 영화는? 그리고 그 이유는? 노아. 여태껏 지구상에서 가장 불필요했던 존재는 인류였다는 진실을 담담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당신의 삶의 질을 향상해줄 비법이 있다면? ‘나의 삶은 지금보다 향상될 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맹목적인 믿음. 당신의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보다 인간적으로 훨씬 더 나은 친구들을 곁에 둔 것. 인생의 비밀을 하나 말해달라. 우리들의 인생은 결국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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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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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의 예조
2014. 7.30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우리는 그렇게 불운한 과거와 명랑하게 작별한다. 하지만 실패한 역사가 비극적인 방식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에선 주기적으로 다리가 끊어지고, 지붕이 무너지며, 배는 가라앉는다. 마치 죽었어야 할 과거가 산 자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꼴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반복되는 우연 속에서 필연을 읽어내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서사와 플롯을 구성해내고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던져야 할 핵심적인 질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최악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 백화점 붕괴, 1999년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그리고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까지 잇달아 발생하는 일련의 참사들은 이제 나름의 전형성을 획득한 듯 보인다. 먼저 정부의 부실한 초기 대응은 사고의 규모를 키우고, 철저하지 않은 원인 검증은 책임의 소재를 불분명하게 한다. 여기에 편승한 정치권은 유가족을 우롱하고, 바쁜 일상에 지친 국민들은 참사를 잊기 시작한다.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는 이러한 큰 이야기의 얼개 위에서 우리는 다들 어차피 체제는 작동하지 않는다며 체념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문제란 이런 것이다. 근대 사회계약의 핵심은 개인의 주권양도이다. 계약을 맺은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암묵적으로 법에 양도한다. 이러한 자연권을 양도받은 절대주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죄인을 처벌하고 나아가 국민들의 생명, 재산, 그리고 안전을 지킨다. 우리는 죽기 싫어 계약을 맺으며, 따라서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 하지만 불행히도 국민들이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이 나라에선 끝내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 정황상 증거는 적지 않다.
철학자 강유원의 표현처럼 “혼돈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합리적 예측 가능성을 근거로 한 체제로서의 근대국가의 구축은 실패”하였다. 연달아 터지는 사고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사고원인, 그리고 미흡한 사고예방책은 우리의 미래를 한층 더 불투명하게 만든다. 현실은 여전히 불안하고 그럴수록 우리의 의식은 보다 확실한 전망을 갈구한다. 이렇게 음모론이 횡행하게 될 토양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인즉슨, 세월호 구조작전은 생쇼에 불과하며 사고의 원흉인 청해진 해운사주 유병언의 죽음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음모론을 동원하여 어수선한 현실과 두려움에 찬 의구심 사이의 간극을 서둘러 봉합한다. 그것만으론 부족했는지, 가령 지난 서울 지하철 2호선 추돌사고 당시 많은 승객들은 열차 안에 남아 있으라고 말하는 차내 안내방송을 무시한 채 강제로 문을 열고 레일 위로 탈출하기도 했다. 국가는 책임을 져버렸고 국민은 그런 국가를 불신한다. 곧 사회계약이 흔들리고 구성원간 신뢰마저 약화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로버트 퍼트넘이라는 학자는 <<사회적 자본과 민주주의>>, <<나홀로 볼링>> 같은 책에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형태의 신뢰를 이야기한다. 앞서 말한 주권양도는 계약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신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약간의 신뢰가 오히려 서로의 이기심을 충족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른바 ‘개명된(enlightened) 이기심’을 갖게 되었다. 사회에 들어온 인간은 더 이상 동물처럼 살지 않는다. 사회계약은 생존의 조건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계기인 셈이다. 하지만 최근 기사에 따르면 상황은 극히 비관적이다. 어버이연합은 농성장을 찾아 "세월호 참사는 거짓 폭력"이라며 소란을 피웠고, 엄마부대 봉사단 역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네요"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유가족을 비난했다. 일간베스트 저장소에는 정부를 규탄하는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가리켜 ‘유족충’이라 부르는 게시글까지 등장했다. 여태껏 사회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비인간적인 욕망과 천박한 현실 인식의 잔해들이 사회계약서 이면에 몸을 감춘 채 웅크리고 있다가 슬슬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중과 신뢰의 부재가 적대적인 태도로 증폭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지금까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는 대한민국이라는 절대주권을 우회하여 개명된 시민사회로 이행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국가-없음’을 가시화하였고 혼란 속 두려움을 틈타 각종 음모론이 사람들의 내면을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점차 사회적 신뢰는 옅어졌고 동시에 추악한 욕망의 민낯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에 비춰지는 사회 전반의 갈등축은 이념이라기보단 되려 인간다움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다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금 국가와 시민사회를 설계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 지켜지지 않는 계약서를 앞에 두고 많은 이들이 난감해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빈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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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smithhh · 9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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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한다는 것에 관하여
2015. 10.14 
취업을 준비하면서 생각해볼 물음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인생의 목표에 관한 것이다. 이십 대 때의 목표는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탁월함의 성취이어야 한다. 행복해지긴 쉽지만 탁월해지긴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쉬이 성취하는 것에 진정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애써 추구하지 않는다. 취업을 ‘잘’ 하지 못해도 행복해질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평범한 노력을 기울이면 어느 정도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페셔널한 기술을 연마하지 않고는 결코 탁월해지기 어렵다. 좋은 직장을 다니지 않고 프로페셔널한 기술을 익히기는 녹록치 않다.
두 번째는 취업을 준비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어제의 나보다 나은 오늘의 내가 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선 열정이 아닌 시스템이 필요하다. 열정은 자주 모호하고 쉽게 소진돼 버린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다르다. 시스템은 능력에 맞게 짜여진 일상에서, 그렇기 때문에 별 다른 노력 없이 습관적으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고안된 자신만의 루틴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소한 일들은 우릴 고단하게 한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건 일회적인 열정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잘 구축된 시스템은 우리가 일상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할 수 있게 한다. 
세 번째는 좋은 직장에 관한 것이다. 좋은 직장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 한 방을 노릴 수 있는 기회, 유능한 동료, 충분한 정도의 보상이다. 경비원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십 대의 첫 직장이 아파트 경비원이라면 남은 일생동안 한 방을 노리긴 불가능하다. 한 방은 일확천금을 얻는 것일 수도 있으나 좀 더 나은 조건의 직장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경비원의 노동은 단순하고 지루하며 보상은 적고 한 방의 기회는 없다. 
유능한 동료가 있다면 나의 발전에도 가속이 붙는다. 말콤 글래드웰에 따르면 똑똑한 학우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17% 이상의 학업 성취율을 증진시킬 수 있다. 유능한 동료와는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상대의 조언을 수용하며 미래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이 나의 역량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자명하다.   
마지막으로 만족스러운 경제적 보상이 없으면 물리적으로 지칠뿐더러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다.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가격이 높은 것이 아니라 가격이 높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다. 마약 판매상의 돈벌이가 쏠쏠하다고 결코 가치 있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 가치 없는 일에 많은 돈을 기꺼이 지출할 만한 조직은 매우 드문 것도 사실이다. 자기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 판별하는 리트머스는 그 사람의 연봉이다.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얘기다. 형편 없는 보상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 자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의심하면서 낭비하는 시간과 소모되는 감정도 모두 비용이다. 그리고 잊지 마시길. 이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은 고용주가 아니라 당신이다.   
말이 길어지는데 끊고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다. 결국 좋은 직장은 가격이 높은 직장이고 그래서 남들이 선호하는 직장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소방관을 가장 가치 있는 직장으로 꼽아도 막상 지원하진 않는다면 소방관을 좋은 직장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가치와 가격의 괴리가 클 때 가치를 논하는 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럴 때 비로소 가격이 가치의 척도로 기능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직장이 높은 가격을 지닌 직장이다. 마이웨이를 외치며 다른 길을 갈 수 있으나 그것의 성공률이 결코 높지 않고 그래서 마이웨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알고 있다.   
네 번째는 어떻게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다. 금강대학교 졸업생은 수능이라는 게임의 승자가 아니다. 수능이라는 게임은 게임 참여자 모두에게 공정한 방식으로 ���행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부모님의 배경, 학우들의 수준, 건강상태 등이 개입하게 된다.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면이 있다. 그러나 구조 탓을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너무도 옳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구조는 변하기 마련이다. 다만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고 대개 구조를 변화시키는 이는 자기 앞가림부터 잘 하는 법이다.   
잠시 구조 탓을 접어둔다면 그 다음으로는 들어갈 때 경쟁이 심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역설적으로 경쟁이 심한 곳이야말로 차별이 적다. 경쟁이 심한 곳의 특징은 유능한 지원자를 빼앗길 경우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애초에 지원자의 인종, 성별, 학력 등으로 차별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건 지원자의 실력이다. 그렇다면 금강대학교 졸업생들이 피해야할 것은 차별이고 선택해야할 것은 경쟁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생에는 돌이킬 수 있는 실수가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자는 실수이지만 후자는 실패이다. 안타깝게도 취업을 '잘' 못하는 것은 후자에 가깝다. 잦은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은 훗날 자신의 인생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좌절은 끊이지 않고 포기해야 할 것은 늘어만 가며 손에 쥐는 것은 적지만 감내해야할 고통은 많아진다. 열심히 노력하면 인생은 한동안 편안해진다. 좋은 직장을 잡는다는 것은 이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지니지만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참고 :
<거의 모든 것의 경제학>, 김동조(지음), 북돋움, ‘13. 5월
 - 경제학의 관점에서 바라 본 세상 거의 모든 것. 전략적이거나 철학적일 것.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동조(지음), 김영사, ‘15. 3월    
 -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냉철하고 현실적인 답변. 시장에서 두려워하기보다 용기를 갖고 선택할 것.   
<열정은 쓰레기다>, 스콧 애덤스(지음), 고유라(옮김), 더퀘스트, ‘15. 9월    
 - 열정이 성공을 이끈다는 통념에 대한 신랄한 반박. 열정보다는 시스템, 관성보다는 효율. 
<괴짜경제학>, 스티븐 래빗 외(지음), 안진환(옮김), 웅진하우스, ‘07. 4월 
 - 현실 속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는 선의가 아닌 ‘인센티브’. 막연한 사색이 아닌 분석적인 사고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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