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요즘 시대의 사랑은 오로지 감정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어려서는 외적인 것에 도취되고 알 수 없는 무의식에 이끌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한 채, 한참을 그렇게 빠져 있었으나 더이상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사랑의 안에서 여러가지의 이성적 사고를 갖게 된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신념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런 면에서 어린 아이같았다.
여전히 무의식의 끌림과 외로움을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기도 하고, 상대가 하는 말과 단어의 안에서 사랑을 유추하기도 했다. 의미가 없는 말에 한참을 메여 그렇게 사랑을 기대했다.
우리에겐 늘 같은 모습을 반복하며 다르다 여길 수 있을 정도의 관대함이 한켠에 살고 있다.
나의 기대는 오늘도 진다.
져버렸다. 그러나 현실을 알아챘다.
더이상 사랑의 기댈 갖지 말아야겠다.
어떠한 그림도 그리지 않겠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내 신념을 바꾸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대와도 외로움과도 상관없는 것이라.
이 시대의 사랑과 다른 길을 가겠다. 나의 이성은 감정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은 진실에 근거한다.
낮보다 밤이 좋은 이유는. 하루를 보냈다는 뿌듯함과 이제는 쉴 수 있다는 안도감과 나의 무의식을 만나 풀어내지 못한 하루와 과거에 열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밤을 통해 나는 ‘지금’의 영원함을 체험한다. 아름다운 밤. 알 수 없는 밤. 매일이 같지 않은 늘 새롭고 늘 낯선 밤.
마치 자신은 나와의 관계에 있어 늘 외톨이며, 피해자의 역할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게 ‘친구’라고 소개한다. 그 친구라는 인물은 내게 늘 연락과 관심을 요구하며, 자신의 진실은 감춘채, 나의 걱정을 가장한 푸념과 하소연 그리고 상처와 날이 선 감정들을 토해낸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너를 알지! 그래서 미안하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거야!”
어제 한 드라마의 대사가 그토록 가슴에 와 닿더니… 아마도 박준 시인의 신간에 나오는 글귀가 아닐까 싶었다. 말은 누군가의 입에서 생겨나 누군가의 귀에서 죽는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다고…
나는 그. 친구를 가장한 한 나그네의 말이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오늘 그 말의 안에 담겨있는 진짜 감정을. 진실을. 파헤치고 싶은 순간이 내게 또 한번 더 찾아왔다.
연락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상대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서로를 연결해주는 것.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인이 잘 지내고 있음을 혹은 어떤 사실과 소식을 그에게 알리고, 상대도 잘 지내고 있음을 내가 알며, 서로의 안부를 기원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연락의 참 된 의미가 아닐까.
그러나 그 어떤 이는 상대에게 ‘친구'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또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포장을 하여, 왜 내가 이렇게까지 널 원하고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그토록 나에게 냉정하고, 어떻게 한번도 나와 같이 생각하며 찾아주지않니 하는 서운함과 원망을 상대에게 투영하고 전함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보상 받길 원하는 것 같다. 그들은 ‘연락’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또 그 드라마에서 참 잊을 수 없는 대사가 나왔다.
“사람의 마음은 묶어두는 것이 아닌데…”
사람의 마음도 관계도, 감정도…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묶어둘 수도 꾸며낼 수도 만들어질 수도 없다. 우리는 그것을 살면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순간을 마주할 사건과 알맞은 때가 오기 마련이니까.
“그냥 난 너가 잘지내는지 궁금하고, 걱정되서 연락해본거야. 너가 편안해질 때까지 기다렸어. 많이 사랑하고 아끼는 소중한 동생이니까.” 이 길고 특별함을 뜻하는 단어들이 듬뿍 들어간 문장에서 왜 나는 단 한구석도 나를 위하는 상대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왜 그토록 나를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라며 내 앞에 와 손을 흔드는데, 나는 그의 손을 잡지 않는 것일까. 왜 그토록 그는 내게 애를 쓸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를 잘 안다는 사람이, 왜 이토록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가. 왜 내게 죄책감을 심어 주려 하는가. 내가 아닌 타인을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왜 다름을, 나와 같지 않은 상대의 마음을. 우리는 그토록 외면하고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을까.
때로는 동성의 관계에서도 이처럼 게임을 요구하는 관계를 마주하곤 한다. 연인들 사이에서도 피곤할 법한 게임을 그들은 모든 관계에서 원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특별함과 각별함을 얻고자 한다. 자기애적 사랑이 깊은 사람들일 수록 더 강한 충동을 느끼는 것만 같다. 나는 사실 그 감정을 모르지 않는다. 한편으로 너무 깊이 잘 알고 있다고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이다. 왜나면 나또한 자기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처가 되는 말이라고 해도 관계를 위해서, 무엇보다 상대를 위한다면 반드시 꾸밈없이 전해야하는 말들이 있다. 그 말은 누군가의 귀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 이전의 나와 같이 마음에 남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오늘 나의 말을 상대에게 전했다.
더이상 나에게 어떠한 기대를 가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당신의 말대로 나는 당신의 연락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다고. 그러나 그건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기에 나는 더이상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그동안의 나는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맞춰진 삶을 살아왔고, 철저히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애 쓰느라, 내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돌보지 못해 스스로에게 무디게 살아왔다고. 이제는 더이상 타인을 위해 나를 방치하거나 외롭게 만들지 않기로 다짐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싶어졌다고도 전했다.
그러니, 당신의 잘못도 아니고, 당신만이 내게 그런 버거운 대상이 아니기에. 더이상은 나에게 어떠한 기대를 하며, 쓸데없이 실망하고 서운한 감정을 키우지 말라고 덧붙였다. 왜냐면 당신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충분히 당신과 잘 어울리고 잘 맞는 이들과의 관계를 충분히 맺을 수 있는 자유와 또 다른 선택권이 있으니, 그런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응원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의 의미가 아닐까 하며…
이제는 그래도 되는.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머무르고 떠나가는 것을 받아들일만한 나이가. 또 한번 성숙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과 그런 내스스로의 선택을 기쁘게 바라보며